세월호의 국가, 그네들의 정부 그리고 우리들의 도시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4. 5. 22

길거리를 지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미안하고 죄스럽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연상되어서 만이 아니다. 이 참극을 이끈 형편없는 국가를 만드는데 틀림없이 일조해왔던 기성세대의 일인으로서 갖는 자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놀랐다. 우리 국가가 이토록 무능한가? 사실 무능한 건 국가가 아니라 지금의 정부라고 해야 옳다. 국가의 사무를 위임 받은 자로서 사명도 책임도 철저히 팽개친 이 엉터리를 질타하고 바꿔야 한다. 그런데, 개조되어야 마땅한 정부가 국가를 개조하자고 했다. 맞는 말일까?
국가와 정부,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이렇게 정의했다. “국가는 국민에게 이익을 주고 보호하는 영원한 선이며, 정부는 국가의 도구로서 국가의 가치에 충실한 한 존재의의를 갖는다.”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정부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니 백 번 옳은 말이며, 국가는 개조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국가가 영원한 선이라니….그래서 반국가사범은 악이어서 중죄로 다스렸던가. 그럴 정도로 국가는 절대적 존재일까?
예컨대 지난 1997년 IMF 외환위기는 미국 금융위기에서 비롯된 사태였음에도 국가는 속수무책이었고, 멀고도 먼 월 가에서 두드리는 컴퓨터 자판으로 인한 우리 국민들의 재정파탄은 불가항력의 사태였다. 국가가 아무리 원했어도 국민을 보호할 수 없었으니 양계초의 국가론이 의문스럽지 아니한가?
국가, 지방, 지역, 구역 그리고 개인의 영역에 이르는 개념은 통치에 근거한 분류이다. 우리가 사는 거주환경의 체계도 이 명령수발 체계가 원활히 작동되도록 여기에 맞추어 조성되어왔다. 중앙로부터 대로 중로 소로를 지나 골목길과 현관 및 복도에 이르는 동선도 그런 계급적 배분에 의해 만든 것이며, 국가와 도시의 상징축을 만들고, 용도와 기능별로 땅을 가르고 용적율이나 건폐율 등으로 차별하는 것도 도시를 영토의 개념으로 파악한 결과이다. 그런 도시에서는 정보가 독점되고 단일창구에서만 흐르게 되어 전제적 통치가 가능해진다. 그게 근대 이전의 국가였고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 스마트 환경의 시대, 모든 정보가 동시에 모두에게 전달되고 공유되는 시스템을 갖춘 이 시대에, 도무지 그런 전 근대적 공간이 우리에게 맞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새로 계획되어 발표되는 도시정책이나 비전은 여전히 구태의연하다.

그런 시대착오를 비웃는 현상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등장해 있다. 이를테면 방의 등장이다. 노래방, 찜질방, 빨래방, 게임방, 심지어는 야릇한 분위기를 풍기는 귀청소방까지, 가장 은밀하던 개인의 공간이 도시 한 가운데 불쑥 나타난 것이다. 공공영역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했던 여러 단계를 건너뛰어 개인과 공공이 맞부닥친 도시, 개인의 공간을 모두가 공유하게 된 이 풍경은 전통적 도시공간의 개념으로는 설명될 수 없어 해석이 필요하였다. 지난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의 한국관 커미셔너였던 건축가 정기용은 이를 ‘방의 도시’라고 이름하고, ‘현재화된 미래’로서 정보화시대 한국의 도시풍경으로 전시하여 세계의 주목을 끈 바 있다.
도시와 농촌의 관계도 수상해졌다. 농촌은 원래 도시의 요구에 의해 만들어졌다. 즉 도시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성격이 부여되고 형성된 공동체이며, 간혹 도시생활에 피로를 느끼는 도시민들이 주말에 들러 쉬는 곳이었다. 다섯 날은 도시에서 이틀 주말은 농촌에서 사는 소위 5도2촌의 삶의 방식은 여유 있는 도시민의 일상이었고, 그런 도시민의 부에 의지하는 농촌은 늘 종적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초고속정보시스템이 재택근무나 직주일체 같은 새로운 직무형태를 가능케 하여, 물 맑고 공기 좋은 농촌에 아예 살면서 주말에는 도시로 나와 영화나 공연을 즐기는 5촌2도의 생활패턴이 생겼다. 아예 도시농업을 제창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일까지 등장하여, 도시광장에 벼를 심기도 하고 도시의 빈 땅을 공동으로 경작하기도 한다. 급기야 도시(Urban)이나 농촌(Rural)이 아니라 Rurban이라는 도농복합공동체가 새롭게 등장했으니, 이 모두가 전통적 도시공간은 이미 철 지난 관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네트워크의 힘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시작한 네트워크의 사회는 전통적 정보전달 체계를 완벽히 무너뜨렸으며, 누구나 어디서나 특별한 사회를 만들기도 하고 공유하면서 소속되기도 한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의 도시와 건축을 총괄하는 시정건축가가 내한하여 현대 도시의 변화에 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 그가 국가연합(UN)의 한계를 극복하는 도시연합체(UC)를 결성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울도 가입하기를 권유했다. 그가 쓴 ‘자족적 도시(Self-Sufficient City)’라는 제목의 책에는, 인터넷이 우리의 삶을 바꾸었는데도 도시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하며, 국가라는 영역 보다는 도시의 네트워크로 세계가 재편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주체는 시민이며, 자족하며 공유하는 도시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어린 학생들로 더 없이 슬프지만 그 못지 않게 가슴 먹먹한 게 있다. 유족들. 극심한 슬픔을 속으로 꾹꾹 눌러 삼키며 지극히 절제하는 그 모습이 더욱 더 슬프고 숙연하여 존경스럽다. 그리고, 이들의 슬픔을 나누기 위하여 생업을 뒤로하고 달려가 서로를 부둥켜 안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헌신. 그들은 사고현장에서, 팽목항에서, 체육관에서, 각지의 분향소에서 그리고 성찰하기 위해 모인 집회장에서, 침묵 속에 나누고 배려하며 절제하고 겸손함으로 슬픔을 공유하는 풍경을 펼쳤다. 외신들이 감동의 기사를 쓸 정도로 더 없이 아름다운 공유의 사회를 형성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영원한 선’이라는 선언이 이제는 낡은 구호이며, 정부라는 게 그네들의 조직으로만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일 수 밖에 없다. 우리 자신 만으로는 힘이 없으니 서로 연대해야 한다. 그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공유도시며, 이를 이룰 다짐만이 이 아픈 시대를 이겨내는 방법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