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투트가르트의 혁명-바이센호프주거단지

중앙일보 사회

2004. 4. 02

요즘 내가 목격하는 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도가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쳐 있다. 주거라는 문제가 우리의 삶의 문제에서 떠나 부동산의 처지로 전락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는 재산 증식의 차원을 넘어 로또 같은 투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커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존재함이란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주거 자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인데 우리 자신을 매매나 요행의 가치로 취급하고 있으니 지속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에 문화가 생겨날 리 없고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소모적이고 투쟁적이 되어가는 것 일 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 로텐부르그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지난 1999년, 파주에 출판도시를 꿈꾸는 출판인들이 본격적 건설을 앞두고 유럽의 도시와 건축을 기행 하면서 들른 도시이다. 나는 이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설계를 조정하고 지휘하는 코디네이터로서 이 기행을 기획하였지만, 몇몇 장소는 출판인 스스로 정보를 얻어 가보기를 원한 곳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로텐부르그였고 열흘 일정 중 첫 기착지였다.
아름다운 풍경이 전개되어 로만틱 가도라는 이름이 붙은 길에 면한 로텐부르그는 12세기에 황제의 도시로 지정이 되면서 남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발달하여 현재에도 그 옛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천년 고도이다. 앙증맞은 첨탑들과 경사진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 붉은 돌과 벽돌로 통일된 듯한 이 작은 도시는 그야말로 예쁜 풍경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 기행에 참가한 출판인들 모두가 마음 속에 이런 풍경의 도시를 그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 도시를 보며 그들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나는, 동행한 몇 건축가들과 이 마을을 거닐면서 그 다음 날 방문하게 되어있는 슈투트가르트의 한 작은 주거지역을 걱정하고 있었다. 로텐부르그를 좋아하는 이들이 백색 슬라브 집들로 된 주거단지에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한 것이다. 슈투트가르트의 북쪽 언덕에 1920년대 후반에 건설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Weissenhofsiedlung)라는 곳에서 발생한 혁명을 상기하는 일이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출판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현장이라고 여겨서 인도하는 길이었다.

유럽의 20세기 초는 소위 건설의 시대이다. 자유와 풍요를 찾아 도시로 밀려오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 없이 많은 도시와 건축이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으나, 새로운 기회를 통해 신흥부자가 된 이들 대부분은 과거 귀족들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여전히 경사진 지붕에 온갖 장식이 달린 집, 이미 시대는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가족 형태도 바뀌고 있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과거에 대한 허영이어서 시대는 바야흐로 퇴행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직감한 지식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논쟁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고 있었으니, 예술과 산업의 합치를 이루려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독일공작연맹(Deutcher Werkbund in Berlin)도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핵심이던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9)는 슈투트가르트 시당국으로부터 바이센호프 지역에 주거단지 설계의 책임을 요청 받으면서 현대건축사에 일대 전기가 마련하게 된다.
3,000평 남짓한 경사진 부지에 결과적으로 33 동의 주거건축이 세워졌을 뿐이지만 이 건축은 세계 건축계의 논쟁의 중심에 서서 많은 아류를 곳곳에 생산해내고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세계건축을 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 사건이었다.

1920년 중반 사회문제의 안정을 위해 힘을 쓰던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얻은 슈투트가르트 시당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그 당시 공작연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 미스에게 이 일의 전권을 맡기지만 시대의 전환에 선 그는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미스는 전체 마스터 플랜을 세우고 난 후 개별 건축설계를 진행하기 위해 젊은 건축가들을 유럽전역에서 불러 모으는데, 더러는 약관의 나이이고 생소하기도 하여 보수적 건축계나 공무원으로부터 끈질긴 반대와 냉소에 부딪혔으나 그는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관철시킨다.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확신을 가진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르 코르뷔제를 비롯하여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된 발터 그로피우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설계한 한스 샤로운 등 초빙된 16명의 건축가들은 대부분 30대 40대였지만 이들은 이 일 이후 20세기 불멸의 건축가가 되었다.

이들은 1927년 6월23일 ‘주거(Wohnung)’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그 전시회의 포스터가 이들이 역사에 대해 취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포스터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옛 집이 그려져 있고 그 위를 강렬한 가위표로 뭉개었으니 이는 과거의 시대와 결별한다는 표시였다.
실제로 그들이 그린 주거는 종래의 주택과는 판이하였다. 지붕은 모두 평지붕이었고 집들은 거의 백색으로 마감되어 전통적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기성 건축계는 이 주거단지를 마치 예루살렘 교외의 한 마을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이 새로운 주거형식은 미래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능적으로 방들을 배치하였고 짧은 동선을 만들어 효율의 가치를 극대화하였으며 주택 내부에 일광을 밝게 끌어들이고 환기와 위생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건설비용과 관리비용을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공간과 장치를 모두 없앴으며 장식을 철저히 배제하여 거주하는 사람의 움직임이 돋보이게 되었다. 집은 이제 신분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도구였다.
코르뷔제는 다섯 가지 현대건축의 원칙을 여기서 세웠고 미스는 표준화를 통해 주택의 대량생산방식을 이룩하였으며 주거는 투명해지고 테라스주택 같은 새로운 유형이 만들어졌다. 모든 건축가들이 새로운 선언을 하고 나타났으니 이는, 로텐부르그 같은 도시를 생각할 때, 혁명이었다.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단연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설계하였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 건축이다. 집의 모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건축을 일개 조형물로 보는 잘못된 관점이다. 건축은 공간에서 그 본질적인 힘을 얻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공간이며 그 공간의 법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결국 우리를 변화하게 한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 닮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이데커의 말처럼 주거는 우리의 삶 자체이다.

로텐부르그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바이센호프까지 마침 긴 시간의 버스여정이 있었다. 나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일어난 이 혁명을 있는 힘을 다해 설명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아파트며 슬라브 집이며 상자곽 집을 왜 보러 오게 했는지 비난 받을 게 틀림 없었다.
나의 설명이 끝나고 버스가 현장에 도착하여 우리들을 내려 놓았을 때 로텐부르그의 과거에서 떠들석하던 것과는 달리 일행 모두 진지하게 된 것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갖게 한 그 역사적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듯 하였으니 건축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