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추방당한 이들

기독공보

2013. 6. 19

‘위대한 침묵(Into a Great Silence)’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험준한 프랑스 알프스 산 밑에 있는 ‘그랑 샤르튀레즈’라는 수도원의 일상을 찍게 해달라는 한 영화감독의 청원이 16년 만에 허락되어서, 그 감독이 6개월 동안 그 수도원에 기거하며 만든 영화입니다. 영화에 의하면 이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정해진 미사에 참예하는 것 말고는 온종일 침묵하며 평생을 독방에서 지냅니다. 이 작은 방은 안에서는 열 수 없고 음식물도 조그만 구멍을 통해서 밖에서 공급합니다. 원래는 하루에 한끼 그것도 빵과 물만 제공했다고 하지요. 우리말로 봉쇄수도원으로 부르는 이 수도원을 영어로는 Cloister와 다르게 Monastery라고 합니다. 홀로됨이라는 뜻에서 기원합니다. 자발적으로 홀로 된다는 것, 스스로를 밖으로 추방하는 일입니다.

서양인의 동양에 대한 편견을 고발한 ‘오리엔탈리즘’을 쓴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기 자신을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경계 안을 관찰하고 비판하며 대안을 내어놓는 자”, 경계 안의 관성과 제도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여 경계 안의 시스템을 개혁하려 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들 때문에 우리 사회는 진보해 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대표적인 분이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지만 스스로 광야로 나가셔서 유대교의 관습을 비판하고 로마총독의 권위를 따르지 아니했으며 소외된 자들과 약한 자들을 껴안고 사랑과 평화를 나누다가 모든 이들이 메시아로 추앙할 때, 다시 스스로를 십자가에 못박아 불멸의 고독으로 나가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순교라는 것. 이 세상에 속한 삶이 아니라는 확실한 믿음이 사도들로 하여금 그런 거룩한 죽음을 맞게 했고, 세상에 죽은 자라는 바울의 고백으로 많은 사람들을 스스로 추방시켜 고독의 삶을 살게 한 것이 바로 수도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인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 당시의 관습을 비판하며 분연히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한 까닭이었고 그로 인해 개신교의 형식이 완성되었으니 우리 기독교는 사회의 경계 밖에 있음으로 그 가치를 찾는 게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항의자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가 그래서 영예로운 이름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한국 개신교는 경계 밖에 있을까요? 개독교라고까지 욕을 먹으며 사회가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고 있다고 하니, 기독교의 역사를 상기하면 이는 치욕입니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아 모였다는 에클레시아가 어원이라고 하지요. 바로 세상 속에 속한 이들 중에서 특별한 은혜로 선택되어 세상 밖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한 이들이 모여있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 가서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인 조캉사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사원 앞 광장에는 온몸을 땅에 엎드리기를 반복하며 기도하는 이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더러는 평생을 걸려 시골의 집에서부터 길바닥에 오체투지하며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팔꿈치와 무릎에 어설픈 보호대를 갖췄지만 상처투성이와 굳을 대로 굳은 살갗의 앙상한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희열이 있었고 표정은 그대로 평화였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수도라는 게, 그냥 관념적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온몸을 던져 길을 닦는 육체의 고통을 동반하며 스스로를 밖으로 던져내어 얻는 실천적 행위라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영화에 동양인으로 보이는 한 신입 수도사가 고통스러운 수도생활을 견딜 수 없어 수도원을 나가겠다고 수도원장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장이 묻습니다. “정녕 나가려느냐?” “예” “어디로 가려느나?” “서울로요.” 그 젊은 수도사는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은 마치 그 경건한 수도원의 반대편에 있는 속된 땅이며 경계의 안쪽에 있는 집단으로 순간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