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타클의 사회, 그 보이지 않는 폭력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4. 4. 24

불과 몇 시간 전에는 살아 있었다니…. 지금, 나만 그렇지 않을 게다. 마음이 하도 먹먹하여 어떤 일도 집중하지 못한 체 마냥 서성거리고만 있는 게…
칼럼을 쓴다는 것도 너무 부질없고 허망해 보여 이제껏 한 줄도 쓸 수 없었다. 부실과 부정, 무책임과 무능함의 총체로 등장한 우리의 기성권력이 어린 학생들을 집단 학살한 이 어처구니 없는 폭력. 보이지 않았지만 이 잔인한 폭력은 언제든 그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소위 국가는 이를 방조하였고 우리는 묵인하고 있었던 게다.

보이지 않는 폭력. 사실 우리는 여기 저기에서 너무나도 많이 이 잠재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벌써 잊혀진 듯 하지만, 불과 얼마 전 세종시에서 한 여성 공무원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지난 해에 이어 두 번째였으니, 이 비극이 혹시 새로 지은 정부청사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 모든 사안을 건축과 관련해서 생각하곤 하는 나는 덜컥 불안하다.
세종시 정부청사는 설계공모를 통해 당선된 스펙타클한 풍경의 안이었다. 위에서 보는 환상적 풍경을 만드느라 전체 건물을 모두 연결시키고 옥상 위를 모두 녹색의 공원으로 그린 역동적 건축이었다. 용 같은 모양이라고도 말했다. 위에서 보는 건축, 그래서 땅에서 이뤄지는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으니 현실적 문제가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옥상 위의 시민공원은 정부청사의 보안체제를 모르는 발상이어서 폐기될 수 밖에 없었고, 전체 청사를 하나로 연결해야 하는 구조가 갖는 동선의 불편함과 그로 인해 조성된 단선적 공간과 환경은 심각한 문제로 이미 예측했던 바다. 더욱이 주변은 아직도 정비되지 않았고 편의시설은 턱없이 부족하니 여기서 강제적 삶을 보내야 하는 이들이 갖는 불안은 언제든 절망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스펙타클한 건축 속에 내재한 폭력성이며 이는 수시로 휴머니즘을 겁박하고 희생을 요구한다.

사실 이 스펙타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추종은 이미 도를 넘어 있다. 특히 민선지방자치시대가 도래한 이후,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세우기에 혈안이 된 단체장들의 스펙타클한 풍경 만들기를 위해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른다. 곳곳에 랜드마크, 테마공원, 무슨 축제, 개발 프로젝트 등으로 도시의 풍경은 괴기하게 되었고 우리의 아름답던 산하와 마을들은 죄다 삽질과 분탕칠로 미증유의 몸살을 앓고 있다. 얼마 전 어느 중앙일간지에서 80년대 이후 조성된 건축물 중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건축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나쁜 예로 서울신청사, 광화문광장, 동대문디자인파크, 예술의 전당 등이 상위에 선정되었다. 모두가 공공시설물이며 권력이 야심 차게 추진한 대표적인 스펙타클 건축이었다. 홀로 주목 받아야 하는 이들 모두는 주변과 조화되지 않는 시설이어서 땅에서 사는 이들의 편에 있지 않다. 베푼 시혜인 양 즐기는 권력자들을 위한 이 기념비적 건축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익숙하게 되기까지 우리는 정신적 경제적 대가를 치를 수 밖에 없으니 이는 폭력일 수 밖에 없다.
20세기 사회에 대한 절망으로 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기드보르는 ‘스펙타클의 사회’란 책에서, “스펙타클은 종교적 환상의 물질적 재구성”이라고 하며 “우리 진실한 삶을 시각적으로 부정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우리 삶은 그 속에서 늘 소외되고 진정성은 겁탈 당한다는 것이다.

21세기가 시작된 2000년 제7회 비엔날레의 주제는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문구였다. 놀라웠다. 내가 아는 한, 서양건축사에 윤리라는 단어는 없기 때문이다. 윤리라는 것은 나와 남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일 진대 서양의 건축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윤리는 우리 선조들의 덕목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늘 자연과 건축과 인간 간의 관계를 염려했으며, 집은 그 관계를 잇는 고리의 역할이었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양의 미학으로 따지면 우리의 집 형태는 기와집 초가집 뿐이었지만 윤리를 따진 까닭에 그 공간의 종류와 변조가 무쌍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서양화가 근대화인 줄 착각하게 되면서 윤리를 추방하고 서양의 미학에 매진하고 있는데, 이제 그들은 윤리로 새 시대 새로운 화두로 삼는다고 하니 황망하였던 것이다.
서양건축사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전과 교회, 왕궁이나 별장, 경기장, 공연장 등 기념비적 건축물의 나열이며, 이들 건축에 대한 형태와 비례, 장식이나 재료 등에 관한 미학적 해설로 일관한다. 그 건축물이 스펙타클할 수록 더 많은 지면을 차지하며 그 시대의 중요한 성취로 기술되어 있지만, 그런 화려한 풍경에서 일반시민의 삶은 언급의 대상이 아니며 환상 속에 빠진 군중만 가끔 병기될 뿐이었다.
도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스펙타클한 건축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이들을 대각선으로 이어서 가장 스펙타클한 광경을 확보한 곳에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자의 화려한 궁전을 두면, 이게 바로 봉건시대의 도시가 된다. 중세 이후 전 유럽에 걸쳐 이상도시란 이름으로 유행처럼 지어진 모든 도시들이 죄다 그러했으며, 현대의 신도시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도심과 부도심 같은 봉건적 잔재의 단어를 실현하고,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를 세우는 일에 온 힘을 쏟고 있으니 이 모두가 스펙타클의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을 뜻한다.
기드보르는 다시 이렇게 선언했다. “스펙타클은 기만과 허위를 공통의 기반으로 서며,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이다.” 그래서 서양은 이제, 그들이 만드는 도시와 건축의 목표는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고 했으며,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고 했고, 완성된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이제 곧 선거 정국이 되면 스펙타클한 계획을 들이대며 환상을 심어 표를 구하는 후보들이 밀려올 게다. 그 대부분이 기만이고 허위여서 결국은 우리를 절망시킬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 삶을 이어나가야 할 우리의 후대를 위해서도 이제는 그런 보이지 않는 폭력을 방조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