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진실을 담은 투명한 공간-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

중앙일보 사회

2004. 4. 16

건축이 창조적 산물이라고 하지만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다른 것을 본받아 답습하고 있을 뿐인 아류이다. 그러나 그런 아류들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한 시대를 결정 짓는 건축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형적 건축이라 부른다. 이 건축 원형은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다. 그 원형질을 만든 건축가의 싱싱한 생명이 그 건축 속에 무서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세기의 건축의 원형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함 없이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6)가 만든 20세기 최대의 혁명적 건축,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을 그 예로 든다.

나치의 광기가 남긴 상처를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먼저 세우기를 원한 것은 무너진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들 도시의 문화적 상징인 베를린 필의 음악이 그들의 회한을 위로할 유효한 치유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치가 세우려 한 도시의 중심축이었던 티어가르텐 지구 남쪽에 있는 켐퍼광장을 택하여 새로운 음악당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 곳은 전후 또 다른 이념 분쟁으로 동과 서를 가른 베를린 장벽이 있는 포츠담광장에 이웃하는 곳이었다.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의 건축가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을 다시 문화의 도시로 환원시켜야 할 당위를 내세우며 ‘문화포럼’을 이곳에 세울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동 베를린에 대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싶어하는 서 베를린 당국을 대단히 매료시키는 제안이었다.
이 건축이 완공된 후 문화적 성취에 고무된 당국은 국립미술관 신관을 계속해서 짓기로 하고 베를린을 24년 동안 떠나 있었던 세계적 거장 미스를 건축가로 초빙하여 문화도시의 완성을 그리게 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며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만들어 근대건축의 일대전기를 마련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 1962년 당시 76세의 이 노장에게 베를린은 잊을 수 없는 건축적 고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바우하우스의 교장까지 하면서 새로운 건축이념인 ‘기술’에 대한 이념을 세웠으나 결실을 보기 전 나치정권의 반문화적 행태에 의해 좌절되고 떠나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미국에서 만개하였다. 기술이 건축의 일개 수단이 아니라 20세기 세계 자체였던 그에게, 1938년 이민지로 택한 철과 유리의 도시 시카고는 약속의 땅이었으니 그는 거기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마침내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가 오랜 건축 세월을 정리할 즈음에, 결코 잊지 못하는 땅 베를린에 세워질 이 미술관의 설계의뢰는 그야말로 그의 건축의 정수를 집중시킬 마지막 기회였으며,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의 지나간 모든 역정이 있었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유작이 된 이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에서 그가 이룩한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이 미술관을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상설 전시는 포디엄이라 칭한 기단부에 두고, 그 위에 8개의 가느다란 철제 기둥으로 지지 되는 64.8m 크기의 정방형 지붕을 띄운 후 그 속에 투명한 공간을 만들어 기획 전시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이 건축은 마치 두 개의 수평면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땅에서 솟은 수평면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 떠 있는 수평면이다. 이 두 면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비어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거나 불과 8개의 가느다란 외부기둥 혹은 기둥 없이 뻗은18m 길이 지붕의 기술적 성취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두 수평면 사이에 창조된 투명한 공간이다. 이 곳은 기획전시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하나, 딱히 어떤 기능이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떠한 기능도 다 수용할 수 있으며 모든 기능을 또한 만들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는 이를 유니버셜 스페이스(Universal Space)라 불렀다. 보편적 공간이라고 번역함직한 이 공간 개념은 21세기 건축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과거의 건축에서 벽체는 두 가지 목적으로 쓰였다. 하나는 지붕을 지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방을 구획하는 것이다. 지붕을 띄울 수 있는 통찰적 기술을 가진 미스에게 벽은 완전히 자유로운 장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미스의 건축은 과거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축, 그래서 둔중하고 불투명할 수 밖에 없는 건축 즉 내부와 외부가 서로 만날 수 없는 건축과 모든 면에서 다른 건축이다. 그것은 테제와 안티테제의 문제였으니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르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이 미술관을 방문한 날은 겨울날 진눈개비가 막 그친 오후였다. 인근의 베를린 필 하모니 홀과 국립도서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이곳으로 접근하던 나를 즐거운 기분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미스의 검은 지붕이 내 시야에 나타난 순간 나는 거의 호흡을 정지해야 했다.
엄청난 긴장이 엄습한 것이다. 건축의 원형을 조우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긴장이었다. 특히 이 미술관의 주변 포츠담광장은, 통독 이후 막강한 서양 자본이 물밀 듯 들어와 온갖 현란한 형식의 상업주의 건물로 또 다른 장벽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진 이 미술관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장엄한 기품으로 그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20세기의 파르테논을 보는 듯하였으며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 건축의 본질적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포디엄에 올랐다. 지면으로부터 불과 90cm정도의 높지 않은 기단이지만, 수평면에 다다른 순간 이미 주변의 도시로부터 구별된 공간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일상의 생활에서 탈피한 듯하고 어쩌면 폐허로 남은 아크로폴리스의 고요함에 도달한 듯하였다. 도시는 이미 저 멀리 아래에 있고 나는 광활한 평원 위에 떠 있는 검은 철제 지붕 속으로 흡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지붕 아래 내부를 둘러 싼16mm두께의 투명유리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그 유리는 주변의 풍경을 투명한 유리상자 안으로 전달하는 매개적 장치였으며, 그 장치 위에는 방금 갠 하늘의 구름이 반사하여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하였고 끊임없이 내 외부를 교류 시키고 투영하며 반사한다. 이 신비의 건축은 도시 속에 서서히 녹아 들고 있는 것이다.
유리문을 밀고 내부로 들어가면 주변의 도시풍경은 이 투명한 공간을 둘러 싼 벽이 된다. 내부의 공간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 풍경에 의해 유쾌하게 되기도 하고 우울해 지기도 하며 때로는 침묵을 가져다 준다. 폐쇄되어 고정된 그래서 목적이 없어지면 공간마저 없어지는 그런 구시대의 건축과는 확연히 반대의 입장에 있는, 항상 살아 있는 공간인 것이다.

미스의 전기작가 프리츠 노이마이어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혹은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혈안이 되어 유행병처럼 부질없는 사기행각의 건축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을 때, 미스가 만든 이 건축은 시적 진실함과 구조적 정직함에 대한 깊은 열망을 많은 사람에게 일깨우는 참으로 신선한 자극제이다.”
90세가 된 노장은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건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969년 영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 투명한 건축 속에 진실의 언어를 가득 담아,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혁명할 것을 외치고 있으니 경외롭고 경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