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으로 남겨지는 건축

중앙일보 시론

2005. 10. 10

우리 역사가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 짧지 않은 세월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 비해 남아 있는 역사적 건축물이 월등하게 적은 까닭이 그들 건축은 주로 석재로 지어졌고 우리는 목재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맞기는 하지만 이는 일부 결과론일 뿐, 근본적으로 건축에 대한 관념의 차이에서 그런 재료의 차이가 생긴 것이라고 하는 게 옳다. 그들은 자연을 적으로 여기거나 지배의 대상으로 여긴 까닭에 자신의 은신처이며 보호막인 건축은 강건해야 하고 존재감을 위해 빼어나야 했지만, 우리 선조들에게 자연은 거역하지 못할 섭리여서 건축은 겸손해야 했고 언제나 자연 속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을 쓰고 우리는 나무나 흙을 주 재료로 썼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건축물 자체가 중요하여 대단한 상징성을 가지려 하지만, 우리에게 건축물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만드는 마당이나 장소가 훨씬 큰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건축물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그들과는 달리 우리는 공간이 보전되어야 했으며 건축물은 항상 시대의 편의에 따라 고쳐 쓰고 바꾸어 쓰는 중창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즉 그들은 건축을 지은 사실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건축과 더불어 사는 과정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또한 서구의 건축은 돌을 쌓아 구조를 만드는 조적(組積)방식이라 짓는 데도 몇 년씩 걸리기 마련이지만 밑에 있는 돌 하나만 빼도 전체 집이 죄다 무너질 수 있어 잘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옛 집은 나무부재를 짜 맞추는 가구(架構)식이어서 금방도 짓고 고치기도 수월하다.
더구나 목조의 건축은 사람의 때가 묻어야 윤기가 나고 숨결이 닿아야 활기를 띤다. 잘 사용하는 것이 잘 보존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 고치기도 하고 이어 짓기도 하여 그 삶의 켜들이 건축 속에 기록되는 데에 우리 건축의 참 맛이 있는 것이다. 즉 우리의 집과 몸은 일체가 되어 있는 까닭에 몸으로 집을 쓰지 않으면 그 집은 이내 망가지기 마련이다.
년 전에 우리 문화를 가꾸는 일에 솔선수범하는 한 민간단체에서 창덕궁의 연경당이 오랫동안 쓰이지 못해 내부구조가 망실되어 가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비용을 부담하고 자청해서 그 내부단장을 새로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새로 한지를 바르고 장판을 곱게 깔았지만, 불을 떼기는커녕 내부에 거주할 수 없어 그 단장은 생소한 채로 남았다. 물론 이내 망가질 게 틀림이 없다.
그렇게 사용하지 못하게 접근을 막는 문화재보호법령 같은 게 있을 게다. 그런데 그 법령에 언급된 관리대상이 건축공간 보다는 건축물 자체이며 그 방법도 다분히 피상적이다. 사람으로부터 격리되어야 보존된다는 경직된 사고 속에 사용금지 접촉불가 출입엄금 같은 용어를 남발하여 문화재를 박제화 하면서 오히려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문화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듯한 움직임이 일어 이를 반기던 차에 며칠 전 창경궁에서 벌어진 어떤 국제행사를 놓고 몇 언론에서 이를 비난하는 것을 보며, 문득 우리가 아직 지우지 못하고 있는 강박적 피해의식을 떠올리고 말았다. 옛날 절대권력자들이 살던 공간을 우리 민중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민주시대가 제공한 특권인데 관람이든 음악회든 파티든 더욱 사용범위를 넓혀 그 특권을 만민이 다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래서 더욱 잘 보전되는 우리네 건축의 특성이고 보면 적극 권장해야 하는 일이지 비방할 일이 아니다.
세월을 잊고 버티는 서구의 건축과는 달리, 우리의 건축 속에 세월을 담아가며 남겨지는 기억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네들보다 더욱 품격 있고 현학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