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로스와 로스하우스_세기말의 위기를 건진 건축

대우건설 사보

1999. 2. 05

건축을 가리켜 기술과 예술이 합쳐져서 만들어 진 것으로 설명하는 경우를 흔치 않게 본다.
이 말이 건축의 부분적 속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지는 모르나 건축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될 수 없다. 건축은 기술이나 예술 이전에, 인류가 삶을 시작하면서 그 역사를 같이 시작하였으며, 기술의 발달이나 예술의 성취는 오히려 건축으로 말미암아 괄목하게 이루어 진 것임을 인류 역사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순서를 봐도 그 설명이 잘못되었다.
영어로 Architecture라는 단어는 으뜸이라는 뜻의 Arch와 기술, 학문이라는 뜻의Tect가 합쳐져서 된 것이니 이를 그대로 옮기면 ‘큰 기술, 큰 학문’이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건축이 우리의 삶에 물리적 환경 뿐 아니라 정신적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게 되므로 큰 기술, 큰 학문이 되지 않으면 그 오묘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건축으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며 이루어진다. 우리 인류가 건축을 만들지만 더불어, 만들어진 건축으로부터 우리의 삶은 자유로울 수가 없다. 대부분 우리의 행동은 그 건축의 위치와 장소에 의해 만들어 지고 심지어 우리의 사고조차 건축에 영향을 받고자 한다. 수행하고자 하는 이가 조용하고 조그만 방을 찾는 것이 그 작은 예이다.
아무튼 우리의 삶과 대단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는 건축인 까닭으로, 어느 한 시대의 건축 속에는 그 시대의 삶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건축이 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완벽한 기억장치가 된다는 말이다.

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건축이 한 시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참 좋은 기록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고고학자들이 옛 사람들의 주거지를 발견하고 환호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건축은 한 시대의 문화를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건축으로부터 지속적인 영향을 받으며 생활하는 한, 때때로 우리의 시대가 지향해야 할 문화의 방향을 가르키기도 한다. 즉 소극적인 거울이 아니라 그 시대의 선과 도덕을 내보이는 적극적인 거울이라는 것이다.
이는 참된 건축이 가져야 할 중요한 가치이며 건축의 역사는 그러한 정통적 건축으로 구성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시대의 전환기 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건축이 있어 왔지만, 한 세기가 종언을 고하는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교훈을 주는 건축이 있다.
아돌프 로스( Adolf Loos )가 설계한 로스하우스( Loos Haus )가 그 것이다.

19세기의 말엽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오랫동안 그 사회를 지탱해 왔던 귀족문화가 서서히 붕괴되고 대중문화가 새로운 가치를 갖게 되면서 이 두 가치체계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형국을 맞는다. 이 갈등은 귀족이나 일반시민 모두에게 그들이 오랜 역사 내내 지녀왔던 가치관의 전도를 가져오게 하였으며, 이는 그 때까지의 시대를 중심적으로 이끈 의식이 실종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른 바 세기말적 징후가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18세기에 유럽에 일기 시작한 산업혁명은 평민에게 부의 축적을 가능케 하였고 생활에 여유를 가져 다 주게 된다. 농민들은 노동의 대가가 보장이 되지 않는 농토를 버리고 더욱 나은 삶을 꿈꾸며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다. 도시는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더욱 발달되는 산업은 경제적 부의 축적을 그들에게 허용한다. 그들 가운데 더러는 스스로 기업을 일구기도 하여 신흥 부자가 속출하고 그들은 경제적 여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여유는 그들이 꿈으로 동경해오던 귀족적 생활을 현실에서 가능하게 하였으나 그들 신분과 의식에 맞지 않는 그 생활은 허영일 수 밖에 없었다. 그 허영은 그들의 삶에서 공허한 것이어서 그들은 그 간극을 메우고자,그들의 의복과 방을 더욱 과도한 장식으로 꾸미고, 나아가 그들이 소유한 건물은 그들의 열등의식을 덥고자 과시적 형태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따라서 공허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사는 도시는 건전하지 못한 가십거리로 가득 차게 되고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에 대한 판별의 기준이 지극히 모호해 지게 되었다. 즉 사회 전반으로 퇴행적 취향이 만연하고 말초적 허무주의에 빠져, 예술은 성을 유희의 도구로 삼으며 도덕의 경계는 희미해 진다. 드디어 그들은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고 그 때가 19세기 말엽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세기말의 위기였다.

합스부르그 왕조 이래 유럽 문화의 중심도시로 자리 잡은 비인 역시 왕조의 퇴조와 더불어 데카당트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전개를 직감한 이 도시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이러한 세기말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정이 긴요함을 각성하고 치열한 예술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분리를 의미하는‘세쎄션’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운동은 ‘그 시대에 그 예술을, 그 예술에 그 자유를 (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이란 경구를 내세우며 관능과 시대착오에 빠진 문화에 새로운 가치와 틀을 세워 정면으로 대립한다. 오토 바그너를 필두로 요셉 마리아 올브리히, 구스타프 크림트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요 예술인이며 지식인들이 모두 이 운동에 동참하고 뜻을 같이 하여 각종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아돌프 로스도 처음에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아돌프 로스는 1870년 브루노에서 한 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그곳의 왕립 기술학교에서 건축을 배운 그는, 20대 초반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의 세계박람회를 견학한 후, 새 시대의 도래에 대한 무한한 감동을 안고 26세 되던 해 비엔나로 돌아와 1933년, 63세의 옹 고집스러운 일생을 마칠 때 까지 줄곧 이 도시에서 활동하였다.
그도 애초에는 이 세쎄션 운동에 동감하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얼마 후, 그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의 이념과 생활마저 또 다른 형식의 강요라고 비판하며 이들로부터 비켜나와 그의 구별된 건축을 그 세기말의 도시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1909년 어느 날 비엔나의 도시 한 복판에 허영에 빠진 이 도시에서 용납할 수 없는 건축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로스하우스가 그것이다.

그가 건물의 개조나 인테리어 설계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무수히 거치고 난후 , 비엔나 시의 중심부에 짓게 된 이 주거와 상업시설의 건축은 아돌프 로스에게는 첫번째 큰 프로젝트인 동시에 이 크기로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의 후기에 그 깊이를 더해 간 그의 건축관은 물론 여기에서도 유감없이 보인다. 순수한 재료 사용이나 도덕적으로 그에게 결정적 건축원칙이 된 장식의 배제, 그리고 그의 후기 주거계획안을 특징지운 공간의 연결성 등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평범한 근대 양식으로 보일 수 있는 겉 모습이지만, 모든 근대 양식이 이 건축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을 의식하고 이 건축을 보면 우리의 시각이 달라진다.
이 건축이 서게 되는 장소는 비엔나에서도 가장 상징적이고 중심적인 곳인 합스부르그 왕조의 궁전인 호프부르그가 위치한 미카엘러 광장의 건너편이었다. 격자의 창으로 무심히 뚫린, 아무런 장식 없는 이 건물은 온갖 화려한 장식으로 둘러싸인 왕궁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었으며 비엔니의 도시가 아름다운 장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 비엔나 시민들에게는 반역적 건축이었다.
당연히도 이 건물을 짓는 동안, 이 새 건물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비난 전선이 일었다. 비난은 주로 상부구조의 무장식에 대한 것에 집중되었다. “눈썹 없는 건물”이라거나, “맨홀뚜껑 같은 건물” 등이 이 부분에 동원된 주된 비난의 언어였으며, 심지어는 로스에 호의적인 비평가들 조차 이 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특유의 날카로운 지성을 가진 로스는 이 건물을 위한 공개 심포지엄에서 장식에 대한 그의 입장을 역설한다.
모든 건축이 스스로를 과시하기에 급급한 도시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 ‘장식은 죄악’이며 참다운 건축은 내부로 향한 것이어야 하고 침묵이야말로 이 어지러운 도시에서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귀머거리에 고함’이라는 글은, 본질과 근원을 잊고 부유하는 그 공허한 사회를 향하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절규이며 심판자적 질타였다.
그의 확신에 찬 충고는 드디어 비엔나의 시민들을 설득하였고 그의 경구는 그 도시의 지식인들을 에게 마저 경탄이 되었다. 그의 친구이자 당대의 철학자인 칼 크라우스는 이 건축을 두고 “아돌프 로스는 미카엘러 광장에 건축을 세운 게 아니라 철학을 세웠다”라고 말하였다.

이 로스의 신념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인간 정신의 승리를 향하는 모더니즘을 탄생케 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 모더니즘은 20 세기의 문화창조를 주도하여 인류로 하여금 세기말의 위기를 극복하게 한 위대한 시대정신 이었으며 우리의 현대를 있게 한 바탕인 것이다.

이미 한 세기 전의 일이며 그것도 우리와 뿌리부터 다른 먼 나라들의 이 역사가 요즘에 끊임없이 상기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왜 잘 살아야 되는지를 모른 체 잘 살아보자고 질주해 온 우리의 지금, 천민자본이 득세하여 도시는 이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그러진 모습의 희한한 건축으로 어지럽고 그 속의 문화는 퇴폐와 저질이며 사회는 온통 무너져 내리는 부정과 부패의 가십으로 가득 찬 모습이 그들의 그 때와 너무도 흡사하다. 가장 빨리 지었다고 자랑한 다리가 끊어지고 넘치는 소비의 상징이던 백화점이 무너져 수 백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 단순한 기술적 붕괴 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 년간 우리사회를 지탱해 온 논리의 붕괴이며 물질에만 탐닉해 온 편향된 가치의 추락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바야흐로 경제로 표현된 초유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게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미궁의 시대를 꿰뚫을 새로운 시대정신을 우리는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 로스하우스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지금도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