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가우디의 이상도시 – 귀엘 공원의 재발견

중앙일보 사회

2004. 5. 14

요즘 서울 가꾸기가 한창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불편을 시민들이 겪고 있지만 결과가 좋으면 그것쯤은 대수가 아닐 게다. 내가 사는 대학로에도 최근 무슨 발전위원회인가를 결성해가며 오랫동안 단장공사를 벌였다. 근데 그 결과가 하도 가관이어서 심사가 보통 뒤틀리지 않는다. 멀쩡한 가로수들을 뽑아내어 우스꽝스런 석조물로 가로분리대를 만들더니 보도를 다 뒤집어 희한한 모양을 그리고 시퍼렇고 시뻘건 재료로 덮어 온 거리를 3류 어린이 놀이터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거리 위에 놓인 조각이란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보고자 해도 통행의 방해물일 뿐이며 새로 설치한 가로등이나 벤치들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요 부조화의 극치니 도대체 우리의 미적 수준이 이토록 저급한 상황인가.
도시 풍경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 건축물들 사이에 있는 빈 공간들이다. 가로나 광장, 공원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의 틈새 공간까지, 도시의 크고 작은 공동체적 삶을 담는 이러한 빈 공간에 대한 배려가 바로 그 도시의 의식수준이며 문화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우리가 선진 도시에 가서 기죽는 이유가 공공 시설물에 표현된 그들의 세련된 문화의지 때문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시공간을 거론할 때마다 요즘 내가 기준으로 삼는 도시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이다. 스페인의 근세사는 부패한 권력과 내전 그리고 독재정치로 쇠락하던 모습이어서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1992년 올림픽을 계기로 괄목할 발전을 이루더니 건축과 디자인을 통해 단연코 세계의 선두대열에 서는 국가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하면 1883년 이래 아직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에도 수만 명의 관광객을 부르는 이 건축에 대해 사실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최고의 탑, 최대 면적 혹은 최장의 공사기간, 이런 기록은 기네스북에 오를 가치가 있는 지는 몰라도 건축의 바른 목표는 아닌 까닭이며, 이 건축의 양식적 분류인 고딕은 이미 오래 전의 것이어서 새로운 시대에 맞지도 않는다. 따라서 내 서가에 그에 관한 책 한 권 놓여 있지 않을 정도로 가우디는 나의 관심 밖이었는데, 이것이 큰 잘못이라는 것을 나는 지난 1999년 귀엘 공원에 가서 비로서 알게 된다.

바르셀로나가 도시공간과 공공시설에 쏟는 노력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는 조금만 거리를 살펴 보면 알 수 있다. 건물들이야 오랜 역사를 지닌 다른 유럽 도시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지만 공원이나 광장, 거리를 가꾼 모습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그들이 공공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그냥 예쁜 단장과 세련된 시설물의 설치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공동의 장소’를 부단히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변두리 언덕을 복합스포츠 지역으로 만든 발 데브론 공원이나 저소득층 주택지인 옛 항구 바르셀로네타를 재개발한 해변가의 풍경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도시성격을 가장 잘 부각시키는 상징적 장소이며 이 도시의 큰 건축이 되었다. 전문 용어로 ‘건축적 조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옥외공간을 건축처럼 만든다는 뜻의 이 단어는 현재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두로서 그 실천이 가장 활발한 곳이 바르셀로나이다.
어떻게 이 도시가 현대건축의 본산지처럼 되었을까.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귀엘 공원이 그 뿌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귀엘 공원의 모습은 화려한 색의 타일조각으로 모자이크 된 벤치나 용이나 거북의 모양을 가진 기묘한 장식물들 그리고 기괴한 모습의 열주들에 대한 인상이며 이 공원을 소개하는 모든 책들이 그러한 사진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장식들로 가득 찬 건축이, 건축을 우리 삶의 문제와 떼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관심을 끌 리가 없어 이 공원을 가는 일에 시큰둥하였으나 공원에 들어가자 마자 나는 긴장하고 말았다.
86개 기둥이 가득 찬 입구의 공간을 들어서는 순간 이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곳은 가우디가 만들고자 한 새로운 도시의 중심 상업 시설인 시장이었으며 이 시장의 옥상인 빈 터는 문화 시설인 공연장이었다. 또한 이 공원은 길의 체계가 완벽한 도시의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공원 속의 평탄지들은 어느 곳에서든 지중해를 볼 수 있게 한 주택지였다. 다시 말하면 이 공원의 모든 시설들은 어떤 도시를 위한 시설이었으니 이 귀엘 공원은 가우디의 이상 도시였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내 서점으로 가서 이 귀엘 공원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가우디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귀엘 백작이 1895년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바르셀로나 교외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고 이 야심 찬 프로젝트를 가우디에게 의뢰하게 된다. 절대주의가 위기에 처한 근대에 기계시대를 바라보며 카탈루냐 지방의 모더니즘을 꿈꾸고 있던 가우디는 마침내 꿈꾸던 그의 이상도시를 그린다. 모든 집들이 바르셀로나의 도시와 지중해를 쳐다보도록 15헥타르의 땅에 300평 내지 600평 크기의 택지 60개를 만들고 문화시설을 비롯한 공동체의 완전한 삶을 위한 여러 세부적 계획을 담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전원이라고 여겼던 땅이 도시의 팽창으로 도시 내에 위치하게 되었고 귀엘 백작과 다른 귀족들간의 의견대립으로 필지 분양이 겨우 3필지에 그쳐 이 도시는 이상 속에만 남게 되었다.
처참한 실패에 대단한 상처를 받은 귀엘 백작은 1918년 운명하게 되고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 전념코자 현장으로 거처를 옮기게 됨에 따라 이 귀엘 공원에 관한 모든 일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팔리지 않은 빈 땅에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히 자랐으며 시당국이 1922년 이 부지들을 매입하여 결국 이 실패한 도시는 공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 완성은 실패하였지만 이미 도시 인프라들이 만들어져 있는 터라 이 공원에는 종래의 공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곳곳의 하수로는 그대로 건축이며 절묘한 길들은 조각 같은 쉼터를 가진 공동체 공간이고 계단은 그러한 공공영역을 아름답게 이어주는 매개공간이다. 조경과 건축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땅이 건축이며 건축이 땅이어서, 도시와 건축, 길과 광장 모두가 완벽히 조화로운 공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현대건축의 중요한 주제이며 바르셀로나의 특유의 풍경인 ‘건축적 조경’에 대한 실마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가우디의 건축을 기기묘묘한 장식과 자유분망한 형태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에게 건축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하며 전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카탈루냐인이었던 그의 건축은 자연과 역사를 건축화 하고자 한 집념의 소산이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더니즘을 위한 제안이었다.

이상도시의 꿈을 접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만 몰두하던 가우디는 1926년 성당 현장 앞의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어 78세의 생을 끝내고 민다. 지극히 검소하며 철저한 금욕적 생활로 이 성당의 작업에 남은 생애를 쏟던 그에게 바르셀로나인의 비탄과 존경이 잇달았으며 수 많은 문상의 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도시는 실패했지만 그의 신념은 오늘날 미궁에 빠진 현대건축을 관통하는 뚜렷한 실마리가 되었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그 실체인 것을 깨달은 나는, 오늘날도 이어지는 참배의 행렬을 찾아 그가 묻힌 이 성당의 현장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