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가우디의 이상세계 – 귀엘 공원의 재발견

대우건설 사보

1999. 7. 18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하면 많은 사람들이 성 가족( 聖家族 )을 의미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Saglada Familia )라는 불가사의한 성당의 웅장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지중해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를 위한 필수적 도시 상징물이된 이 고딕양식류의 성당은 아직 지어 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에도 수 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본체 구조물조차 아직 올라가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완성된 부속탑과 현란한 건축 디테일, 기기묘묘한 장식만으로도 원근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감탄 시키는 것이다. 이 성당의 지하에는 이 성당의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 Antonio Gaudi )가 묻혀 있다. 불세출의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그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이 성당의 완성을 위해 몰두하던 중, 1926년 이 성당의 현장을 감독 지휘하고 점심식사를 위해 이 현장 앞의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어 78세의 생을 마감한다. 검소하기 짝이 없으며 철저한 금욕적 생활로 이 성당의 작업에만 몰두한 그에게 한없는 바르셀로나인의 비탄과 존경이 잇달았으며 수 많은 문상의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아마 모든 극적 요소를 가진 이 성당건축이야말로 수 많은 이들을 동시에 열광케 할 수 있는 20세기 최고의 건축 사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 성당에 대해 그 동안 그다지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고 있었다. 최고로 높은 탑이라든가 최대의 크기 혹은 최장의 공사기간 이러한 기록은 기네스북에 오를 가치가 있는 지는 몰라도 그것이 건축의 올바른 목표는 아니다. 또한 이 건축이 고딕의 정신을 그대로 답습하고 바로크의 정신을 변용하는 자세를 취하는 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새로운 건축이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이를 만든 가우디에 관하여도, 그의 놀라운 기량에 경탄하면서도 높은 점수를 주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내 서가에 가우디에 관한 책 한 권도 놓여 있지 않을 정도로 나는 어쩌면 그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다는 것을 나는 지난 봄에서야 비로서 알게 된다.

바르셀로나에 가보면 다른 도시와는 다소 다른 분위기가 있다. 역사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것은 유럽의 다른 도시와 공통적이며 해안에 위치한 도시가 갖는 낭만적 분위기도 여타의 항구 도시와 같지만 도시 전체가 참으로 세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인상의 연유를 파악하기 위해 조금만 유심히 살피면 바르셀로나의 도시 풍경에는 조경적 기교가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지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맞아 도시 전체가 새로운 단장을 한 덕분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올림픽이 지난 지금에도, 아니 그 전에서부터 바르셀로나의 도시경관은 부단히 새롭다. 건축물이 새로 지어질 빈 땅이 있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대부분 지난 시대의 때들이 덕지 덕지 묻은 건축물들이 즐비한 이 거리가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그나마 새로운 건축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가로나 공원 등의 공공 공간들이 새롭게 바뀌기 때문이었다. 새롭게 바뀐 공공공간이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모습이 그냥 보통의 공원이나 가로의 예쁜 단장이 아니라 예사롭지 않은 감동을 주는 ‘장소’라는 곳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올림픽 때 만들어진 발 데 에브론( Val d’Hebron )이라는 곳이라든지 바르셀로네타( Barcelloneta ) 같은 곳을 가보면 단순한 공원이나 해변이라기 보다는 공원의 의미 혹은 공원과 도시와의 관계 나아가 우리 삶의 궁극적 목표 같은 도시적 선언을 듣게 된다. 그들이 만든 외부 공간은 단순한 조경의 차원을 떠나 작은 도시 공간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로서의 큰 건축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다소 전문적으로 이야기 하면 ‘건축적 조경( Architectural Landscape )’이라는 말이 된다. ‘건축적 조경’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외부공간에 단순히 나무나 꽃을 심어 채우는 게 아니라 땅을 건축처럼 다시 만드는 것이며, 그 땅에 세워지는 건축은 그 땅의 형국을 닮아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즉 건축과 조경 혹은 건축과 장소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 있다는 것이다. 이 ‘건축적 조경’이라는 단어는 현재 서구 건축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화두이다. 이 화두의 실천적 방법들을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바르셀로나가 이 중요한 현대건축의 키워드를 생산해내는 본산지 처럼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귀엘 공원( Parc Guell )이 그 뿌리라는 것을 알아내고 나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귀엘 공원의 모습은 화려한 색채의 타일조각으로 모자이크된 벤치나 용이나 거북 등의 모양을 가진 기묘한 장식물들 그리고 기괴한 모습의 열주들에 대한 인상이며 이 공원을 소개하는 모든 책들이 그러한 사진만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장식적 요소들로 가득 찬 건축이, 건축을 항상 우리 삶의 문제와 떼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관심을 끌 리가 없어 다소 시큰둥한 마음으로 이 귀엘 공원을 산책하였으나 그러한 나의 선입관이 전혀 잘못된 것임을 아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아니하였다. 이 공원에 있는 모든 장식적 요소들은 이 공원이 나에게 준 감동에 비하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입구 부분에 있는 86개의 기둥이 가득 찬 공간을 들어서는 순간 이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하였다. 그가 왜 이런 열주의 공간을 공원에다 만들었을까. 이 6m 높이의 기둥들로 떠 받쳐진 공간은 바로 가우디가 만들고자 한 새로운 도시의 중심 상업 시설인 시장 공간이었으며 이 기둥들 위의 비어져 있는 공간은 문화 시설인 공연장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이 시설들은 한 도시를 위한 공공 시설이었다. 그러하였다. 이 귀엘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었다. 가우디가 만든 이상 도시의 실체였던 것이다. 공원으로 오인된 가우디의 이 이상도시는 각종 도시의 시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길의 체계나 길과 집이 만나는 방법 등 그 공간의 전이와 기법이 완벽한 구성과 드라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는 테라스 같은 곳을 곳곳에 만들어 놓은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 경사진 땅에 놓여진 도시 어느 곳에서든 지중해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이 테라스들은 열주와 계단들에 의해 공간적 긴장을 연출하고 있다.
나는 이내 서점으로 가서 이 귀엘 공원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 보게 되었으며 드디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가우디가 바르셀로나의 부호이자 문화 애호자인 귀엘 백작을 그의 강력한 패트론으로 두면서 그의 신비적이고 상징적 건축관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귀엘 백작 역시 그의 꿈을 이 영감에 가득찬 건축가의 손을 빌어 현실화 시킨다는 것 또한 적지 않은 복이었다. 몇몇 건축을 가우디로 하여금 짓게 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둔 귀엘 백작은 1895년부터 새로운 도시를 만들 것을 꿈꾸며 바르셀로나 교외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고 이 야심찬 이상도시의 설계를 가우디에게 의뢰하게 된다. 에번네저 호와드( Ebenezer Howardes ) 가 ‘전원도시( Garden City of Tomorrow )’ 에 대한 개념을 세상에 발표하기 7년 전의 일이었다.
가우디는 절대주의가 위기에 처한 근대에 기계시대를 바라보며 진보정신에 입각한 카탈루냐 지방의 모더니즘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짓는 모든 집들이 바르셀로나의 도시와 지중해를 쳐다보는 풍경을 그리며 더불어 내부의 공동체를 완성하도록 공동의 시설들에 관해 몰두하였다. 애초의 계획에 따르면 15헥타르의 땅에 300평 내지 600평 크기의 택지 60개를 만들었다는 것이고 서로의 시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용적율 17%의 제한을 규정하는 등 여러 세부적 계획을 담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교외에 부지를 마련했으나 바르셀로나의 도시팽창으로 도시권역 내에 위치하게 되었고 귀엘 백작과 다른 귀족들간의 의견대립으로 필지의 분양이 겨우 3필지에 그쳐 이 도시는 귀엘 백작의 이상 속에만 남게 되었다. 이 도시의 실패로 대단한 상처를 받은 귀엘 백작은 1918년 운명하게 되고 이에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 전념코자 성당건축 현장으로 거처를 옮기게 됨에 따라 이 귀엘 공원에 관한 모든 일은 중단되게 된다. 그리고 팔리지 않은 비어진 땅에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히 자랐으며 시당국이 1922년 이 부지들을 매입하여 결국 이 실패한 도시는 공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의 건설에는 실패하였지만 이미 도시의 인프라들이 만들어져 있는 터라 이 공원은 종래의 전통적 공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 공원을 걷노라면 마치 아름다운 시골길을 걷는 듯하며 계단을 오르노라면 그 끝에는 오랜 친구의 집이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야말로 땅 자체가 건축이며 조경과 건축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현대건축의 가장 광범위한 주제이며 바르셀로나의 특유의 건축 어휘인 ‘건축적 조경’에 대한 실마리가 있었던 것이며 바로 가우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 가우디의 건축을 장식과 형태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에게 건축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건축은 반드시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하며 전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카탈루냐인이었던 가우디의 건축은 적어도 자연과 역사를 건축화 하고자 하는 집념의 소산이며 나아가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더니즘을 위한 제안인 것이다.
이제야 그 정신이 이해되고 긍정되어 그의 건축에서 보여준 정신이 후학들의 키워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귀엘 공원의 서쪽 끝에는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발걸음이 뜸한 곳인데 이곳에는 가우디가 이 이상도시를 위한 성당을 짓다 만 흔적이 남아 있다. 비교적 큰 성당을 지으려 했으나 공사의 중단으로 입구 부분의 돌 제단 만을 만들고 말았다. 이 돌제단 위에는 돌로 만든 3개의 십자가가 서 있다. 이름하여 ‘성스러운 언덕’이라는 이 곳에 올라보면 건너편 언덕에 귀엘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 대부분을 볼 수 있다.
나의 눈에는 그들이 세우려 한 도시와 건축의 모습들이 오버랩 되어 들어 오는 듯 하였다. 귀엘 백작의 사업은 실패했지만 가우디의 건축 이상은 실현되어 오늘날 미궁에 빠진 현대건축을 관통하는 뚜렷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귀엘 공원을 마치 디즈니랜드 처럼 여기고 있었던 나에게는 놀라운 재발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