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중앙일보

2001. 7. 25

소위 하이테크라든가 초고속 정보화 시대 속에서 건축 설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요즘 설계되고 지어지는 집들은 얼마나 이러한 시대에 발 맞추어 있는 것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백년 전, 천년 전에 견주어 요즘의 건축이 과연 그 시간 만큼 진보한 것일까. 건축 기술이야 확실히 발달해서 옛날 보다 순식간에 짓기도 하고 아주 높이 올라가기도 하지만 그 기술이라는 것은 건축을 구성하는 속성 중 한 부분일 뿐이다. 건축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의 삶을 담아 새롭게 조직하는 일에서 얻어진다. 이것은 대단히 인문학적인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건설이 아닌 건축에 있어 기술은 이러한 명제의 하위 수단인 것이어서. 기술의 발달로 건축의 진보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바로 건축의 발달을 건축 공간적 문제이거나 건축 미학 등의 문화적 입장에서 따져야 한다고 할 때, 건축은 과거보다 얼마만큼 진보해 있는 것일까.
지난 달 프랑스의 남부를 여행하면서 12세기에 지어진 르 토로네라는 수도원을 보고 나는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지고 말았다. 지난 세기의 대표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제가 세운 리용 근처의 라 투렛 수도원은 현대건축의 성지처럼 되어 지금도 수많은 건축학도가 순례하는 곳이다. 나의 건축에도 중요한 참고서처럼 되어 온 이 코르뷔제 건축의 원전이 사실은 이 오래 된 수도원이라는 것이 나를 몹시 당혹하게 한 것이다. 오히려 20세기 거장의 가장 대표적 걸작인 라 투렛 수도원 보다 무명의 수도사들이 만든 건축이 훨씬 강건하고 고요하며 진실된 공간을 만들고 있었고 그곳의 황홀한 빛은 코르뷔제의 빛 보다 더욱 오묘하고 깊었던 것이다. 수도원의 건축으로 치면 코르뷔제는 12세기 보다 조금도 진보하지 않았다는 불경스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득 몇 년 전에 폼페이의 폐허를 방문해서 느꼈던 생각이 겹쳤다. 폼페이의 폐허 속에는 아름다움에 탐닉한 로마인들의 현실세계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었다. 그러한 공간들은 정교한 실 그물처럼 잘 조직되어 있어서 현대의 신 도시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절묘한 공간들이 도처에 보였다. 완벽한 도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폼페이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는 도시가 되어 마침내 화산의 폭발로 그 운명을 맞이 했을까. 비약적 공상이었지만, 아무튼 문화는 항상 진보하는 것이 아닐 게라고 믿기 시작했다.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보면 그 정황의 증거를 댈 수 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서울의 지도를 보면 마치 한 폭의 풍경화처럼 보인다. 북한산과 인왕산, 관악산 등이 기세 좋게 벋어 내리고 한강과 청계천 그리고 시냇물들이 이곳 저곳에서 흐르며 그 사이 양지바른 터에 앉은 집들이 이루는 그 지도의 풍경은 이 도시가 얼마나 아름다운 도시인가를 상상케 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현대의 지도 제작자가 만든 지금의 서울 지도를 보자. 붉은 색 푸른색 노란 색으로 우리의 삶 터를 용도 매김하고 도심과 부도심으로 계급화 하며 그 사이의 붉은 도로망은 마치 이들 자본과 재화를 엮는 사슬처럼 되어 있다. 약육강식의 싸움터 같은 이 지도 속에서는 우리의 삶이 참으로 왜소해 보인다. 아무리 봐도 옛 지도에서의 삶이 훨씬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 삶을 담아 시대의 거울 역할을 하는 건축과 도시는 오늘날 진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퇴보한 것일 게라고 여기면 건축을 업으로 하며 오늘날을 사는 나는 너무 초라해 진다. 요즘이 하도 어려운 세상이어서 복고적 취향이 만연하기 마련인 때라고 자위를 하는 모습을 스스로 안쓰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드디어 내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 가를 심각하게 알게 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 지던 날 비를 피하여 황급히 가던 시민 몇이 가로등에 감전되어 죽었단다. 이 무슨 말인가. 지금이 하이테크, 사이버의 시대 아닌가. 그런데 길 가는 이가 맹수에 피습 당하듯 죽고 만 것이다. 우리가 지금 새로운 야만의 시대에서 살고 있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