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건축가

생활성서

2022. 1. 01

저는 개신교인입니다. 그것도, 못된 신앙이라고 우스개로 말하는 모태신앙인입니다. 사춘기 때는, 제 의지와 관계없이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것에 반항기가 들어, 교회에서 그토록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목사님에게 말도 안되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해대며 못된 짓을 일삼았습니다. 그 질문들 때문에 신학을 전공하겠다고 했지만 집안 반대로 결국 건축을 택하고 말았지요.

개신교도인 것이 문득 자랑스럽게 여겨진 때가 있었는데 바로 프로테스탄트라는 단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요. 개신교도는 프로테스탄트 즉 항의자라는 뜻입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 관습과 계율이 부당하다고 여기면 굴종하지 않고 의문을 제기하며 정정을 요구하는 이들이라는 뜻이지요.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것 같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관습에 의문을 표시하고 로마 총독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며 이방인 심지어는 범죄자와도 잘 어울리셨습니다. 주일성수도 가끔 어겼고 열심히 기도하는 교인들에게는 외식한다고 꾸짖으실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당신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까지 하셨으니 이런 지독한 항의자가 예전에 없었습니다.

아, 예수님의 세상 직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의 삶은 성경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지만 그전 30년의 삶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습니다. 탄생에 대한 이야기와 열두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알려진 게 없습니다. 다만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이 목수라고 기술되어 있어 예수님도 가업을 이어 받아 목수일을 하셨을 걸로 짐작할 뿐이지요. 제 어릴 적 성탄절날 성극을 할 때면 예수님의 집안을 목공소로 꾸몄던 적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줄로만 알다가, 건축을 전공하면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을 한번 여행한 후에는 예수님이 목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지웠습니다.

지중해에 면한 이스라엘 땅은 나무가 잘 자리지 못하는 석회암 지질로 척박합니다. 올리브나무가 많지만 목재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못해 큰 목재가 필요하면 레바논에서 백향목이라는 삼나무를 수입했다고 성경에 적혀 있을 정도니 나무로 집 짓는다는 건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집 짓는 목수라는 직업이 있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보니 영어로 번역되기 전의 희랍어 성경에는 요셉의 직업이 텍톤(TEKTON)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바로 건축가를 뜻하는 영어 architect의 어간인 텍트와 같은 말이었습니다.

텍톤을 그대로 번역하자면 건축자였고 요즘 말로는 건축가입니다. 2천년전의 30세라면 지금으로는 5,60의 경륜을 쌓았을 때이며, 가문의 직업을 이어받았을 예수님은 어릴 적부터 지혜가 남달랐으니 직업적으로도 성공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게 무리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건축가로서도 성공하였을 터이고 건축의 본질이며 건축가의 태도나 자세에 대해서도 일가를 이루지 않았을까요? Architect의 Arch가 크고 으뜸이라는 뜻이라 예수님을 지칭하기엔 더욱 적합할 듯도 합니다.

건축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는 앞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하려고 합니다. 다만, 텍톤이라는 단어 즉 무엇을 구축하거나 짓는다는 뜻의 이 말은 우리말의 짓기와 똑 같습니다. 즉 시를 짓거나 밥을 짓거나 옷을 지을 때 혹은 농사를 지을 때도 쓰는 이 단어는, 한 사람이 어떤 질료나 재료를 가지고 사상과 이념을 기반으로 솜씨와 과정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뜻합니다. 즉 건축은 맹렬한 사유과정을 통하는 창조적 행위라는 것이지요. 이런 건축이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은 명확합니다. 윈스턴 처칠은 1943년 10월, 나치의 공격으로 무너진 영국의회의사당 건물의 폐허 위에서 이를 복원할 것을 약속하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이 다시 우리를 만든다.’ 저는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오래 걸리고 더디지만 건축은 우리를 바꿉니다. 좋은 건축 속에 살아야 좋은 삶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건축은 우리에게 몹시 중요합니다.

건축가는 자기 집이 아니라 남이 사는 공간을 조직하는 자입니다. 이 말은, 처칠의 말을 상기하면, 다른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직능을 가진 자라는 뜻입니다. 건축가가 맨 처음 그리게 되는 도면이 삶의 조직을 표현하는 평면도인데 이는 건물의 중간을 잘라서 위에서 보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시선을 무한대로 올려야 하며 마치 신의 위치에 도달해야 제대로 평면도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는, 다른 이들의 삶을 잘 조직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히 타자화시킨 객관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건축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필경,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 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합니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이니 온유해야 하고 긍휼해야 하며 청결해야 하고 화평케 해야 합니다. 특히,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늘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고 스스로를 깨끗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단연코 거부해야 합니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기 위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하지요.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 받을 각오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 사는 일을 알기 위해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위해서는,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합니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 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가가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아마도, 건축가로서 건축의 본질을 꿰뚫고 건축이 사람을 바꾸는 것을 아셨으며, 건축가로서의 바른 삶을 사셨기에 스스로를 광야로 추방하셨고, 이제는 세상을 바꿀 것을 결심하시고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오신 분, 그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 어둠에 처하고 절망에 빠진 자들을 모두 안아 위로하고 그들이 모두 메시아라고 칭송할 때 십자가에 매달려 스스로를 다시 세상 밖으로 추방하여 불멸이 되신 분, 그래서 그로 인하여 세상이 바뀌고 지금에도 사람들을 바꾸시는 분, 주님. 그분을 저는 큰 건축가 the Arch-Tect라고 부르고 싶은 것입니다.

저요? 저도 건축가라고 칭하지만 제가 그런 바른 건축가가 되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언감생심이며 그 흉내조차 내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건축가라고 칭하며 사는 일이 늘 두렵고 아픕니다. 제가 잘못 선을 그으면 제 건축 속에서 살게 되는 이들이 잘못될까 불안해서 늘 결정장애에도 시달립니다. 한 가지는 압니다. 다른 이들의 삶에 관계하는 이 일이 성직일 수 밖에 없다는 것. 어릴 적 꿈꾸었던 신학을 건축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늘 주님의 은총을 구할 뿐입니다.

 

개신교인인 제가 여기에 글을 연재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언제까지 쓰게 될 지 모르지만, 청탁을 수락한 이유를 굳이 대자면, 무엇보다도 제가 카톨릭에 진 빚 때문입니다. 아, 동경도 있네요. 그 빚과 동경을 건축을 통해 서술할 것인데, 걱정이 태산입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