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새로운 시작

중앙일보

2001. 3. 28

建築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동물적 본능을 충족하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持續시킨다는 점이다. 즉 우리의 과거를 보존하고 현재의 삶을 기록하며 미래를 꿈꾸게 하는 施設로서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건축을 時代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건축도 세월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어서 언젠가는 스러질 수 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그곳에 건축이 있었다는 事實이며 우리의 삶이 기록되었다는 그곳의 歷史이다. 그곳이라는 것. 이것이 場所이다. 장소는 여러 가지 사건이 행해지는 곳이며 文化가 쌓여 우리의 共同體가 支持 되는 基盤인 것이다. 따라서 장소에 대한 發見이 건축의 가장 중요한 시작이 되고 그 解釋이 건축의 마지막이 된다.
지난 50년간 우리에게 안타까운 禁忌로 남은 非武裝地帶라는 그 장소. 25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와 4킬로미터 폭의 이 땅, 어쩌면 民統線까지 포함하여 그 보다 훨씬 더 큰 크기의 이 땅은 나에게 줄곧 未知의 세계였고 難解한 意味였으며 어쩌면 두렵기까지 한 象徵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은 알게 되었다. 참으로 감격스럽게 그 곳에 서서 그 장소의 의미를 되묻고 되물었던 것이다.

비무장지대에 대한 개인적 好奇心과는 별도로, 中央日報에서 조직한 踏査團의 一員으로 내게 주어진 첫째 임무는 舊 鐵原에 산재해 있는 勞動黨당사를 비롯한 廢墟의 건축에 대해 敍述하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채 오늘날까지 방치 되어 있는 슬픈 現場을 보고 그 감동을 建築家의 입장에서 전달하라는 것일 게다.
노동당당사가 있는 구 철원 읍이라는 곳은 옛날에는 서울과 元山을 잇는 京元線의 중간 寄着地로서 서울에서 金剛山을 가는 旅路와 맞물려 해방 무렵까지 교통의 要衝地로 번성했던 도시였다. 분단과 전쟁으로 파괴되고 나뉘어져서 그 옛 都市의 번영을 오늘날 짐작하기는 도저히 어렵다. 이 도시의 그 아픔이 어떠했을까. 그 증언을 바로 노동당당사의 폐허에서 생생히 들을 수 있다.
朝鮮勞動黨 鐵原郡 黨舍. 이 건축은 解放직후 38선의 북측 지역이던 이곳에 3층 규모로 세워졌다. 郡民들의 성금을 모아 그 건설비를 충당했다고 하며 내부에는 각종 비밀스런 방들이 많았다고 한다. 3층 바닥은 파괴되어 없어졌으나 1층의 방들과 2층의 바닥에 남은 壁들의 흔적들에서 그 당시 있었음 직 했던 日常들을 類推하는 일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때로는 숨 막힐 듯한 순간들이 이곳 저곳의 방들에서 있었을 것이고 다른 방에선 陰謀와 術數가 끊임 없이 만들어 졌으리라. 수도 없는 憤怒와 挫折과 絶望도 이 크고 작은 공간에서 뒹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유추하여 想起하면 뭣 하랴. 그 일상들은 이미 유적이 되어 흉물의 꼴을 하고 남은 벽 속에 그 허무함을 묻고 만 것이다. 그런 채로 이 건축은 停止하여 서 있다.
나는 직업 상, 삶의 기록이 있는 곳이면 세계 어디든 기회 닫는 대로 가보기를 쉴 새 없이 하여 왔다. 특히 폐허를 찾아서 옛 삶들을 기억해 내는 즐거움은 어디 비할 바가 아니다. 폐허라는 곳이 본디 悲壯感을 주는 장소임에도 몇 개 남지 않은 건물의 흔적을 들추어 옛 삶들을 부활해 내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노동당사에서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일을 그만 두었다. 불과 50년 밖에 안 된 역사 때문인가. 아니면 내 땅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가. 아니다. 이 폐허로 남은 노동당사 자체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며 그것도 너무도 생생히 부활된 리얼리티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뻥 뚫린 벽 밖으로 보이는 평화스러운 보리밭의 풍경이 아득한 미래로 느껴진다.
이런 폐허는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가 어렵다. 이 노동당사 만이 아니었다. 日帝시대에 高利貸金 하던 철원 제2金融組合의 폐허를 비롯하여 각종 관공서나 크고 작은 건축들의 파괴된 모습이 이곳 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전부가 폐허이며 상처이고 現代의 遺蹟이다. 아마도 어떤 戰爭記念館이나 평화를 위한 弘報館보다도 더욱 절절한 記念과 自覺의 도시이며 건축이리라.
知覺 없는 관광객들의 왁작 지껄임은 오히려 나를 悲嘆에서 구해주었다. 이 벅찬 悔恨을 안으며 나는 나의 所任을 끝내고 있었지만 나의 건축 답사는 이제부터 漸入可景이 된다.

철원평야는 생각보다 훨씬 드넓었다. 우리 彊土 한 가운데 이렇게 넓은 平坦地가 있을 줄이야. 이 넓은 철원평야를 가로지른 비무장지대 속에 弓裔가 세운 궁터도 있다고 한다. 아마도 수 많은 폐허가 남아 있을 거다. 그런 생각으로 月井里 OP를 올라 비무장지대를 내려다 본 순간 나는 稀代의 風景을 목격하게 되었다.
철원평야를 가로지른 防壁이 그것이다. 평탄지대로 침투할 가능성이 있는 人民軍의 탱크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두께의 콘크리트 옹벽을 높이 쌓아 그 넓은 평야를 가로 질러 나아 가는 壯觀이었다. 대 役事였다. 마치 어느 곳인가 우주인이 그렸다는 宇宙船의 착륙장 같은 그런 불가사의한 스케일 조차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장대한 크기이다. 더구나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끝에 마치 저 땅 밑으로부터 힘차게 隆起한 地層처럼 보인다.
베를린을 갈랐던 障壁이 무엔가. 이 벽은 우리가 넘을 수 있을 지언 정 허물어질 벽이 아니며 이 시대의 상징으로 영원히 남을 벽이다. 濟州島의 大正 마을 밭 바닥에 박혀있는 알또르 비행장 格納庫의 콘크리트 더미가 이내 오버랩 되었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땅에 이런 시리디 시린 유적을 더 만들어야 하는가. 격한 감정이 오른다….. 다만 이 벽의 저 편에 아름답게 자라난 습지와 희귀한 植生들이 만드는 絶景이 나를 위로하며 다독거린다.
그 날은 날씨도 몹시 흐렸다. 오후엔 실비까지 내려 나는 못내 침울한 분위기에 싸이고 있었다. 실비를 맞으며 가파른 길을 달려 올라간 鷄雄山OP에서 본 광경. 나는 예상치 않은 풍경에 드디어 압도 당하고 만다. 나로서는 이 답사의 白眉였다.
그 곳에서는 비무장지대의 넓은 면적을 내려다 보게 되어 있다. 광활한 視界가 펼쳐져서 이곳 저곳에 준수하게 솟은 봉우리가 보이고 민들 벌판의 넉넉함도 나타나며 南大川의 물줄기도 유유히 흐른다. 참 아름다운 風光이다. 우리 강토가 얼마나 아름다운 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안내 장교는 이곳에서 지난 날 있었던 북측과의 접전과 대립의 사례들을 몇 가지 들려주었다. 그 내용 보다 이들 장교들의 성실한 안내에 감탄하던 나는 밖의 흐릿한 경치를 내려다 보다 한 절벽 위에 서 있는 건축을 보고 茫然自失하고 말았다. 아 저곳에 建築이 있는 것이다.
우리 측 GP로 사용되는 소박한 건물이었다. 너무도 경건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풍광의 자연은 우리에게 좋은 감상의 대상이지만 영혼을 울리는 감동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나는 여긴다. 때때로 자연 자체는 의미조차 없다. 그러나 그 의미 없는 자연에 삶의 터전이 들어서면 우리들 공동체의 바탕인 장소가 되고 의미가 되는 것이다. 그것도 저 絶海 孤島 속에 인간의 의지가 있어 삶을 엮는 건축이 선 까닭에 따뜻한 풍경을 만들어 감동을 전한다. 비록 긴장과 대립 속에 처절한 고독을 부둥켜 안아야 하는 삶을 저 속에서 살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음에 우리의 선함과 진실함과 아름다움을 저 풍경 속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문화이다. 어느 中世의 修道院인들 저런 시린 아름다움을 전하랴.

靈感에 충만했던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은 이런 말을 남겼다. “섬 속이나 산 중의 한 장소에서 우리는 그들의 분명한 진실을 본다. 그들을 두고 도시로 떠나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이며 蘇生된 믿음을 그로부터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적어도 나는 서울로 돌아 오며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나 뿐이 아닐 것이다. 우리 時代의 矛盾으로 잉태된 현대의 遺蹟, 이 비무장지대라는 장소는, 슬픈 역사를 桎梏처럼 거머져야 했던 우리에게 새로운 始作點이며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根據가 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다시 시작한다. 여기 시리도록 아름다운 ‘場所’가 우리에게 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