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모두의 성소, 집

생활성서

2022. 8. 01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집단거주지가 바로 성경에 나오는 예리코입니다. 대략 만년 전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폐허가 된 이곳을 그림으로 복원한 집 모양들을 보면 요즘의 중동지역에 있는 집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한 집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건축사는 시대별 양식을 고전건축,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등으로 구분하지만, 주거건축은 시대를 거쳐도 잘 변하지 않아 그 구분에 잘 등장하지 않습니다. 중국의 한 지방에서는 무려 4천년전의 집을 아직 그대로 쓰고 있다고 하니, 주택의 변화가 더딘 것은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우리들 삶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라는 뜻일 겝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했습니다. 가운데 마당을 둘러싸며 ㄱ자 ㄷ자 ㅁ자로 이뤄진 집을 기와나 짚풀로 덮은 모양은, 수천년간 변함없이 이 땅에 지어 왔던 우리의 고유한 주거형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랜 주거형식이 일거에 바뀌는 시대가 있었는데 지난 6,70년대입니다. 그때에 새롭게 등장한 주택을 속칭하여 ‘불란서 미니2층집’이라고 했습니다. 마침 유행하던 노래가 있었지요. 남진이 부른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곡. 나라 전체에 경제개발 구호가 아침저녁으로 울리던 그때, 전쟁의 비극을 딛고 돈도 좀 벌기 시작한 모두들에게 새집의 열망을 부추긴 노래입니다. 그래서 그 노래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을 만들기 위해 마당에 잔디를 심고, ‘그림 같은 집’을 실현하려 프랑스에도 없는 희한한 형태의 집을 세우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어’ 담장 둘러 병조각 쇠조각을 꽂아 생긴 집이 그 ‘불란서 미니2층집’입니다. 반지하에 다락 같은 2층을 두고 지붕을 엇갈린 박공으로 씌운 집, 우리나라 주거역사에서 듣도보도 못했던 이 집은 선풍적 인기를 얻으며 전국으로 퍼졌고 이내 한국 현대주택의 전형이 되고 맙니다.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집이 더욱 획기적인 것은 겉모양이 아닙니다. 이 집이 등장하기 전의 옛집들은 방 이름을 안방, 건넛방, 문간방 등으로 불렸습니다. 위치에 따른 이름이지요. 화장실도 뒤에 있다고 뒷간으로 부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새롭게 등장한 집의 방은 서양을 흉내내며 거실, 침실, 식당 등 목적에 따라 부릅니다. 이런 방들 안에는 소파나 침대 등의 가구가 점령해 있고 우리는 그 가구가 요구하는대로 삽니다. 완전히 객체적 삶입니다. 옛날 집의 방은 딱히 정해진 목적도 가구도 없는 빈 방이었습니다. 어느 방이든 우리가 밥 먹고 싶으면 식탁을 펴고, 자고 싶으면 요를 깔고, 책 읽고자 하면 서탁을 놓으며 주체적으로 그 용도를 정하며 살았지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옛 집은 궁리와 사유로 가득 찼지만 이 불란서 미니2층집은 가구로 채운 집이며,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래서 생각없이 살고있는지 모릅니다.

그 보다 중요한 게 또 있습니다. 우리 옛집에는 우리만 거주하지 않았습니다. 신과 함께 거주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집을 착공할 때 개토식, 땅을 여는 예식으로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서양에서는 이를 earth-breaking, 즉 땅 깨뜨리기라고 하니 참 지각 없는 표현이지요. 또한 상량식이나 준공식을 통해 그 집을 관장하게 될 신에게 예를 갖추며 가호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 집에 살면서도 부엌이나 대청에 길흉화복을 주관하는 성주신을 모시는 장치를 만들고 복을 빕니다. 뿐만 아닙니다. 어떤 집은 사당까지 갖추고 조상의 죽음을 기립니다. 죽은 이의 혼령과 신과 같이 거주하는 집, 그런 경건한 삶을 사는 집이 우리의 옛집이었습니다.

이런 집들이 모인 마을에는 또한 신당이 있습니다. 수백년 수령의 나무 옆에 작은 집을 짓고 마을의 안녕을 빌며 공동체를 확인합니다. 어쩌면 그 부근에는 마을묘지가 있게 마련이어서 죽음과 더불어 사니, 그런 삶은 늘 겸허한 마음으로 운명을 신에게 의탁하며 삶을 가다듬게 마련이겠지요. 그게 잡신이건 무속이건 우리의 조상들은 그렇게 영성적으로 풍부한 삶을 산 것입니다.

수천년을 이어오던 이런 영성의 풍경이 없어진 게 바로 지난 개발시대였습니다. 불란서 미니2층집의 출현과 병 조각 꼽힌 담장은 이웃을 적대하여 동네는 같이 모여사는 곳이 아니라 붙어사는 거류지가 되었습니다. 공동주택이라는 아파트는 더 합니다.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자기집의 현관으로 향하니 옆집에 누가 사는 지도 모릅니다. 방들은 가구가 다 점령하고 아이들이 방문을 닫으면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게다가 요즘은 오로지 진리가 스마트폰에 있다고 믿는지 줄곧 그 작은 기기에 머리를 들여밀고 가족조차 멀리합니다. 사회공동체 가족공동체가 건강할 리 없습니다.

주택 밖은 또 어떻습니까? 영성의 샘이 되어야 할 종교시설은 상업시설보다 더한 꼴로 있는 게 많습니다. 종교시설이라면 죄인마저 환대해야 할 텐데 오히려 높은 담장과 철문으로 접근을 막는 배타적 건축이 대다수입니다. 그런데도 붉은 네온의 십자가를 꽂아 교회라고 강변하며 선전에 몰두합니다. 영성이 그런 곳에 거주할 리가 없겠지요. 마을 가까이 있던 무덤은 부동산에 대한 근심으로 아예 도시의 경계 밖 멀리 좇아낸 지 아주 오래고, 어떤 지역의 성당이 용케 결심하여 납골당을 설치하려 하면 온 동네 주민들이 험악하게 소리치며 결사반대 합니다. 그래서 돈은 세계에서 10위권으로 잘 번다고 하는데, 유엔의 행복지수 조사로는 늘 80위권이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가 하루에 무려 마흔 명 가까워 세계 제일의 절망적 나라가 되었습니다. 단언컨대 우리의 건축과 도시에서 영성이 사라진 까닭입니다.

 

저는 건축설계를 할 때에 건축주가 요구하는 방들 외에 특별한 다른 공간을 슬쩍 그려 권유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집이라면 옛집의 문방 같은 사유를 위한 방 하나 더 그려놓고, 작은 사무소 건물에는 직원들이 혼자 울 수 있는 방을 옥상에라도 그립니다. 심지어는 어떤 화장실은 아주 높은 층고로 만들어 경건한 변소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 특별한 공간이 거주자로 하여금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그의 삶을 잠깐이라도 묵상하게 하고 새 힘을 얻게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다가 최근에 어느 유명한 영화배우의 집을 설계하고 지었습니다. 그녀는 70년대 중반 그 땅에 들어선 그 ‘불란서 미니2층집’에서 살며 전성기를 보낸 바 있었는데, 그녀의 요구대로 집을 허물고 임대용 건물만을 짓기에는 그 장소에 담긴 기억이 너무도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기념관처럼 짓자고 제안을 하고 그녀가 거처할 집을 맨 위에 두고 아래층에는 전시관을 설계하였습니다. 그 전시관 안에 아주 작은 공간을 설정하고 층고를 높게 해서 지붕을 사각뿔의 형태로 만든 다음, 남쪽의 경사진 지붕면에 그녀의 별자리인 물병자리의 별 위치 마다 조그만 창들을 뚫어 빛을 받았습니다. 이 빛들은 시간에 따라 오묘하게 그 형태와 위치를 바꾸며 작고 높은 이 공간을 비춥니다. 아쿠아리우스 피라미드라 불렀습니다. 신비스럽습니다. 이 풍경에 감동한 그녀는 이 작은 공간을 자신의 납골당으로 만들면 안되겠냐는 말을 저에게 조심스럽게 건넸습니다. 저는 바로 납골함을 만들어 설치하여 결국 이 공간은 영성에 가득 찬 묘역이며 성소가 되었고 그녀는 가까운 성당의 신부님을 모시고 작은 축복식까지 지냈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 작은 장소에 홀로 앉아 묵상하고 나오면 그렇게 기분이 맑아진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늘 목도하면서 사는 그녀의 삶이 특별해질 것은 너무도 명확해서 그녀가 앞으로 들려줄 삶이 무척 기대됩니다.

사실은 그렇게 새롭게 짓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사는 평범한 집에 한 칸이라도 정하여,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새끼줄 꼬거나 천을 매듭지어 벽에 달아 놓듯, 우리의 영성을 북돋게 하는 간단한 장치 하나라도 만들어 놓고 묵상한다면 이미 우리의 영성을 맑고 깊게 하는 성사의 모습이며 그로써 우리의 집은 모두 성소가 됩니다. 작은 성소로서 우리 모두의 집들.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영성의 도시에 살고 있을게며 그러면 우리는 복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