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옛 건축 다섯에서의 사색

중앙일보 사회

2011. 7. 20

이 여름 휴가철, 건축을 주제로 보내시면 어떠신지. 그런 특별한 분을 위해 내가 좋아하는 옛 건축 몇 군데를 일러드리고 싶다. 좋은 사색의 시간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실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의 옛 건축으로부터 영향 받은 게 너무도 많다. 공간의 의미와 비움의 아름다움을 배웠고 우리 삶에 맞는 건물의 치수와 크기를 배웠으며 자연 속에 서는 건물의 좌향과 집합하는 방법을 배웠다. 지금도 간혹 건축에 의문이 들 때면 구태여 이들을 찾아가 내 생각을 확인하곤 한다. 이 땅에 남은 모든 옛 건축들에 그런 빚을 지고 있지만, 그 중 다섯 곳만 사유를 들어 소개한다.
아무래도 종묘가 첫 번째인데, 조선의 왕들의 신위를 여전히 모시는 실제적 기능이 있는 건축이다. 일백 미터 길이의 지붕이 검붉은 공간을 누르며 월대 위의 비움과 마주하는 종묘정전의 모습은 이 세상 건축을 모두 통 털어 압권이다. 건축이 얼마만큼 위대한가. 부슬비 오는 날 혼자서 이 월대 위에 펼쳐진 한없는 비움 속에 서 있어 보시라. 나는 그것으로 건축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었으며, 지금도 내 건축의 정체성이 혼란에 빠질 때 나는 여기를 찾는다.

하회마을에 있는 병산서원은 더욱 각별한 건축이다. 건축이 어떤 방법으로 땅과 연관을 맺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자연과 건축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너무도 절묘하여, 자연은 여기서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더욱 귀하게 보이니 이를 담는 건축은 그 자체로 지혜다. 건축은 지혜로 말미암아 짓는다고 성경의 잠언에 있던가.
안강의 독락당은 서양건축과 우리 건축의 차이를 아주 잘 드러낸다. 같은 16세기에 이탈리아 비첸차에 지어져 지금까지 서양건축의 텍스트가 된 빌라로툰다라는 집과 비교하면 우리의 건축이 왜 다르고 아름다운지 바로 알 수 있다. 요즘에, ‘덜 미학적인 것이, 더 윤리적이다” 라는 구호를 새 시대 새로운 화두로 삼는 서양이지만, 이는 이미 이 집에서 실천한 우리 선조의 당연한 덕목이었던 것이다.

지난 번 칼럼에서 소개한 영주 봉정사의 영산암도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이 암자가 가진 비움의 아름다움에 대해 쓰고 난 후 몇몇 지인들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요즘에는 번지르한 기와를 새로 입혀서 내가 기술한 그런 고졸한 아름다움이 다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럴 게다. 이 땅에 몇 남지 않은 옛 건축들이 그런 식으로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예가 수두룩하다. 새 기와야 시간의 때가 묻으면 다시 낯익은 풍경이 되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어 탄식을 자아낸다. 특히 사찰건축이 유독 그렇다. 중창불사를 내세우며 증축 개축을 해댄 터에 역사가 오랜 옛 사찰이 가지는 엄정한 격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콘크리트로 기와집을 흉내 내며 건축의 진정성을 왜곡하기도 하며, 솜씨 없는 장인들에 의해 보물 같은 옛집들이 천박하게 치장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본질마저 심하게 왜곡하는 예도 있다. 내가 오래 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며 극찬했던 대구 근교 비슬산의 어떤 절로 가는 길은, 근래 온갖 희한한 장식과 석물, 콘크리트 포장으로 바뀌어 나를 절망케 했다. 없는 듯 있고 끊어진 듯 이어지며 나를 끊임없이 사유하게 하던 그 가난한 길을 두고 “보이지 않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글까지 쓴 적이 있었는데, 보이는 물질에 얽매이는 사바세계의 몽매무지함으로 그 아름다운 길은 이제 기억에만 남게 되었다.

그런 답답함을 풀어주는 곳이 있다. 바로 승주에 있는 선암사다. 이 절은 1954년 법난으로 불려지는 태고종과 조계종의 분규가 일어난 후 아직도 재산의 소유권 다툼이 법원에 계류 중이어서 중창불사를 할 수 없게 된 곳이다. 내 욕심으로만 보면, 우리 옛 건축으로서는 대단한 전화위복이요 천만다행이 되었다. 그만큼 원형이 대단히 잘 보존되어 있다. 원래는 50 채가 넘는 규모의 큰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20여 채의 건물만 남아 있는데, 그래도 이 사찰의 경내를 둘러보다 보면 마치 어떤 작은 마을 속을 거니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대개 사찰건축은 불교적 위계를 따라 대웅전을 중심축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다소 무겁다. 그러나 이 선암사의 각 건물들은 각기 다른 단위 별로 중심을 두고 독립적 영역을 구성하여 모두가 존재감을 갖고 있다. 쉰 채가 있든 스무 채가 있든, 설혹 한 채만 있어도 그대로 선암사다. 즉 개별 가치가 전체와 같으니, 차별 속에 평등한 그게 화엄사상이라고 했다. 그래서인가. 선암사는 모든 부분이 아기자기하며 드라마틱하고 변화무쌍하다. 게다가 모두 진정성이 있는 건축이어서 어디를 가든 흥미진진하다. 사시사철 꽃도 많은 이곳에 요즘은 특히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한창일 게다.

이 여름, 우리의 서정을 다시 일깨우는 이 아름다운 우리의 옛 건축들을 찾아 느긋이 회유하며 도시에 지친 우리 삶을 위로하게 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