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의 시대와 `건축사신문`, 그리고 지방

2009. 6. 29

칼 맑스가 불과 30세에 쓴 ‘공산당 선언’보다 세계를 요동치게 한 글이 있었을까?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인한 정신적 자유와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이룬 물질적 자유가 부르주아를 태동하게 한 후 세계의 새로운 중심권력이 된 자본주의의 사회적 폐해를 경고한 그 글은 지금에 읽어도 우리를 새롭게 하는 고전이 되었다. 비록 그의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의 가치를 양분한 공산주의는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그 가치가 소멸되었지만, 그의 사상이 20세기적 새로운 삶을 만든 것을 부인할 수 없다. ■ 세기말의 위기(Fin de Siècle)를 탈출하게 한 모더니즘의 사상가들은 그가 강조한 공유하는 사회적 삶, 노동의 가치를 건축의 중심테제에 놓음으로써 우리를 봉건적 삶과 구별시켰다. 주택의 구조가 바뀌고 집합주거의 중심이 공동영역으로 옮겨 갔으며 이윽고 대두한 국제주의 양식으로 전세계의 건축과 도시의 풍경을 바꾸면서 세계를 주도하는 이념으로 20세기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 이성과 합리성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 이 정신은 본래 서구의 중심과 주변 같은 이원론에 바탕을 둔 계급체제였으니, 무엇보다 인간의 개별적 성격과 지역의 특수성을 애써 무시했던 이 가치는 인간의 감성과 지역의 힘이 성장하면서 그 기세를 잃고 말았다. ■ 포스트 모더니즘과 레이트 모더니즘, 해체주의 등이 그 뒤를 이어 세계의 건축과 철학계의 지배담론이 된 듯 하더니 이내 시들해 졌다. 건축은 비틀고 뒤틀려야 하고 본질은 외면당하고 표피만 무성하다. 그리고는 어떤 사조가 지금 이 시대를 주도하는 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다. 어떤 사조도 주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백가가 쟁명하고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시대가 지금 아닌가? ■ 또 하나 있다. 20세기가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IMF사태라는 외환유통위기로 시작된 경제난을 겪어야 했다. 이 IMF사태는 우리에게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심각한 의심을 가지게 하였다. 국가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저 멀리 뉴욕의 월 가에서 두드리는 컴퓨터 망에 얽혀진 개인을 보호할 수 없게 되었으니, 우리를 지배하는 권력이 국가 외에도 또 있었던 것이다. 이 IMF가 국제적 약자인 우리에게 국한된 문제인가 싶었더니, 미국에서 천민적 자본의 행태가 발생시킨 서브프라임이라는 사태는 미증유의 국제적 경제위기를 불러와 지금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 세계를 움직이는 권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보의 힘이었다. ■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는 힘은 본래 선지의 능력 때문이다. 선지자가 먼저 안 것을 지도계층에게 알리고 그 지식이 그 계층의 구미에 맞으면 대중을 설득하며 시대의 지배담론이 되는 게 지식권력의 전통적 구조였다. 그러나 이 고전적 체계가 웹이라는 정보전달체계의 혁명으로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으며 만인이 이를 동시에 접하고 재생산해내는 이 전대미문의 지식세상은 경제뿐 아니라 정치와 문화의 지형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으니 바야흐로 우리는 전시대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에 내몰리어있다. 쿠오바디스? ‘건축사신문’. 건축사와 뉴스라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이 매체가-그것도 지방에서 만드는데도 10년의 역사를 맞는다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클릭만하면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어 뉴스의 효능은 없어졌으련만 10년을 계속해 내어왔다니 대단하고, 건축사라는 지리멸렬한(?) 전문인들을 대상으로 내어온 데에는 더욱 대단함을 느낀다. ■ 무엇이 지난 10년을 지속하게 했을까? 나는 이 신문이 갖는 ‘지방성’의 힘이라고 믿는다. 사실 중앙이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세상은 이미 옛 세상이다. 정보의 힘이 중앙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된 현실에 중앙은 이미 부패하기 쉬운 허상이며, 서툴더라도 새로움으로 힘을 얻는 주변과 지방이 훨씬 건강할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 에드워드 사이드는 ‘권력과 지성인’이란 책에서 ‘지성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서 반응하며……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건축사의 직능이 다른 이의 삶을 변화시켜주는 건축설계의 작업이라면 그는 지식인일 수 밖에 없다. 그가 지식인인 한,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 ■ 그런 이들이 연대하여 만드는 정보매체가 ‘건축사 신문’이라면, 이 웹의 시대에, 중앙이라는 이미 효능이 정지된 곳에서 아직도 스스로를 추방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복음지가 될 것이라 믿으며, 기꺼이 그 연대에 참가할 것이다. 모든 이가 주체로서 역사를 쓰는 지금, 지방은 중앙에서 쫓겨난 변두리가 아니다. 국적을 잃은 자들의 고향이며 힘이다. 그렇다면 칼 맑스의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방의 건축사여, 연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