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지방신문연합

2011. 9. 20

이상향으로 번역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토마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에서 두 단어를 차용해서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가지는데 비해, U의 의미가 이중성을 띤다. ‘유’라고 발음되는 그리스어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eu, ou가 다 같이 ‘유’로 발음되지만,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니,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라는 것이 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설명하는 그림이 있다. 그림 속의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며,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내부를 해자가 또 감싸고 도는데, 곳곳에 설치된 감시망루를 거쳐 섬의 가운데로 들어가면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나타난다. 즉 한 통치자의 지배하에서 철저한 감시체계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가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준 이 책은 급기야 신도시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이윽고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아프리카 북부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세워졌다. 그 신도시들의 평면은 하나같이 단일중심의 중앙집권적 구조로서, 내부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둘레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밖으로 해자를 깊게 파서 철저히 외부와 차단되는 통제적 도시였으며, 육지의 섬이었다. 근대화 과정을 겪으며 견고한 성벽은 다 허물어졌지만 그 도시구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고립된 세계를 꿈꾼 것을 여전히 증거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적 세계를 동경한 것이었으며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불행히도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

우리의 땅에도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은 많은 신도시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워졌으나 많은 도시문제를 양산한 바 있다. 신도시는 그렇다 쳐도, 더 큰 문제는 오랫동안 고유한 삶터를 일구어온 우리의 옛 도시에 불기 시작한 재개발이라는 사업이었다. 우리의 마을은 서양의 도시와는 그 근본부터 다른 것이다. 머리 속에서 유토피아를 그려서 평면 위에 실현한 도시가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따라 산과 물이 만든 지리에 복속하며 일궈놓은 풍경이었으니 그 자체가 아름다운 산수화였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서양의 도시이론을 흉내 낸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터가 유린당하고 만 것이다. 우리 옛 도시에 불현듯 등장한 아파트단지가 그 유토피아를 치졸하게 실현한 대표적 결과였다. 몇 채가 들어서든지 아파트 단지는 울타리를 치고 주변을 단절시켰으며 으레 몇 개의 출입구를 통해서 출입을 통제하고, 도시의 도로는 이 단지만 만나면 통과되지 못하고 둘러서 지나야 했다. 결국 도시의 섬이 되고만 아파트단지는 다른 섬들과 부동산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며 사회의 갈등을 유발하는 적대적 공동체였다. 더구나 이 땅에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였다. 정치가가 몇 채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건설자본은 이를 뒷받침하여 그 임기 내에 졸속으로 지어댔으니, 어디에도 우리들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담론이 없었고 건축의 시대적 정신도 없었다. 그 분별없는 유토피아는 오로지 스스로 폐쇄함으로 고립된 부동산공동체일 뿐이었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다. 1932년 알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타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는 철저히 통제된 사회가 바로 이 디스토피아다. 외부와 소통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 역시 애초에는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였으니, 결국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폐쇄적 공동체인 까닭이다.
얼마 전 서울에서 무상급식에 관한 투표가 있던 날, 서울의 최상류층이 산다는 어느 고층아파트 단지에서 투표참관인조차 출입을 거부당한 일이 발생했다. 외부인이라는 이유에서다. 사회의 통념과 법규마저 무시하는 폐쇄적 공동체가 벌인 희극이었다. 이 공동체의 미래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무엇이든, 폐쇄공동체를 지향하는 한 그 결과는 비극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