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신의 소산-소쇄의 정신 가득한 담양 소쇄원

주간조선

2003. 11. 20

박 경리의 토지에 ‘소쇄한 그 모습은 귀공자의 풍모가 역력했고 냉담해 보이는 인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다소 생소한 단어인 ‘소쇄(瀟灑)하다’라는 형용사는 기운이 맑고 깨끗함을 뜻한다고 한다. 이 단어와 딱 어울리는 장소가 있으니 바로 담양에 있는 한국의 정원 ‘소쇄원’이다.

한국의 정원을 일본이나 중국의 조원술(造園術)과 비교하여 한 수 아래로 접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기암 괴석을 축조하여 휘황찬란한 경관을 이루는 중국정원의 형식도 우리에겐 없고, 일본의 정원에서 만나는 그 아기자기하고 섬세하여 숨막힐 듯한 정적의 아름다움 또한 우리가 갖지 못한 경지라 하여 우리의 이 땅에는 정원의 수준이 현저히 낮다고 비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고도로 세련된 지적 감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선조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정도는 명료함을 너머 지혜로움 그 자체였다. 자연을 지배의 대상으로 삼아 인위적으로 과장된 제스처를 가지는 것은 금기였으며 놀이의 대상으로 자연을 농락하는 일은 경망스러운 것이었다. 자연은 그 자체가 선이요 동반자며 공존의 대상이어서 함께 어우러지는 우리 자신인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 실증이 소쇄원에 있다.

담양 땅은 서북에서 솟은 골짜기의 물들이 흘러 영산강을 이루면서 휘돌아 나간 탓에 그 평지의 크기가 넓고 토질이 비옥하여 예부터 경제적 풍요를 이룬 곳이다. 그 경제력은 당대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바탕이 되어 수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고, 중앙 정계에서 은퇴하거나 각종 사화로 인해 밀려난 선비들은 이곳으로 다시 낙향하여 학문에 힘쓰게 된다.
수양과 학문 뿐 아니라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가꾸는 일은 그들의 정신세계의 총체적 결과였다. 소쇄원을 비롯하여 면앙정, 명옥헌, 송강정, 식영정 등이 대표적인 것들인데 그 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최고의 정원건축으로 평가를 받는다.

소쇄원은 양 산보(梁山甫 1502-1557)가 30대에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그 후대에도 계속 확장이 이루어져 왔다. 양 산보는 15세에 조광조를 만나 그 문하에서 수련한 유학자였는데,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그 유배지까지 따라 갔다가 사약을 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아 고향으로 은둔하여 이 소쇄원을 만든다.
이 소쇄원은 수 많은 기록이 남아 증언하듯 많은 당대의 지식인들이 풍광과 여유를 즐긴 장소요 그들의 정신세계를 격정적으로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로 자리하였다. 성리학의 거두 김 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기대승, 정철, 송시열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이 곳을 넘나 들며 그들 학문의 지평을 넓힌 것이다.

물길이 있는 계곡을 가운데 두고 전체 1,500평 정도의 경사지에 꾸며져 있지만 사실 소쇄원의 영역은 지금은 차가 다니는 국도변에 심겨진 대나무 숲에서 시작한다. 울창한 대나무의 숲이 만드는 벽과 물길 사이로 난 좁고 길다란 길은 세속의 세계를 빠져 나와 선계로 오르는 참배길 이어서, 흐르는 물소리에 대나무 숲 사이로 비취는 햇살이 더해서 만드는 그 오묘한 분위기에 이미 우리의 마음을 씻는다.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곳에 대단히 다이나믹한 풍경의 계곡이 밝은 햇살을 받으며 전개 되는데 그 생김새가 대단히 복잡하다. 북쪽 계곡에서 흘러온 물길이 이런 저런 바위 틈과 위를 지나며 부딪히고 모아져서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계곡 안을 가득 채운다. 건너편에는 집이 두 채가 있는데 위에 있는 3간의 집이 이 소쇄원의 주인이 거처하는 제월당(霽月堂)이며, 아래 가로세로 각 3간의 팔작지붕의 집이 주로 손님들이 기거하는 광풍각(光風閣)이다. 광풍제월이라 했던가. 비갠 후 떠오른 달빛에 부는 청명한 바람…… 참으로 기운이 맑고 밝아 가히 소쇄하지 아니한가. 듣기만 하여도 마음은 이미 맑아진 듯 하다.
이 작은 두 건물은 지극히 소박하고 간단하다. 따라서 그냥 햇살 가득한 아름다운 자연 계곡에 순응하듯 그냥 세운 두 건축…… 이렇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소쇄원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몇 개의 레벨 차이로 인해 다양한 동선을 만드는 이 계곡 속에 이뤄진 공간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바위 사이에는 다리도 있고 징검돌도 있으며 세족할 공간도 있다. 물레방아도 있고 연못도 있으며 경사진 지형을 오르기 위한 계단과 석축 등이 슬쩍 슬쩍 있는데 이들이 심상치 않은 것들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공 건조물이다. 이들이 앉은 방식을 보면 대단히 교묘하다. 주인이 기거하는 높은 곳에 있는 제월당의 레벨에는 꽃과 나무와 담장과 수평으로 연결되는 정적 요소들로 이뤄져 있고, 풍류의 손님들이 드나드는 광풍각은 그 모양도 활개치듯 오르는 처마선이 흐르는 물과 변화무쌍한 바위와 그들이 만드는 소리들과 함께 대단히 동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그 두 레벨 사이에 주된 통로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 길은 때로는 단을 디디고 때로는 바위를 건너며 때로는 물길을 도는 유보도(遊步道)가 되어, 두 다른 레벨을 이으면서 서로 교류하게 하고 부닫히게 하여 일체를 이루게 하는 매개공간이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바위는 때때로 인공적으로 절단되었으며 물길은 간혹 바꿔지기도 하고 지형의 레벨은 조작되어 있다. 어찌 이 공간이 자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조작의 결과가 결단코 부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해야 한다. 여기에는 자연을 지배하려 하는 오만이 있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희롱하려 드는 모자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자연과 적극적으로 공존하려는 자세이며 자연과 나를 서로 납득시키는 지식인의 창조적 태도이다.
이것이 진정한 소쇄의 정신 아닐까. 그렇다. 그것은 순전히 양산보라는 인문학자가 가진 작가정신이며 바로 소쇄원은 그 치열한 작가정신의 소산인 것이다.
지나친 아전인수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외경한다. 우리 선조들의 그 끝 모를 성찰의 깊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