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작은 출입문

2000. 11. 02

나는 건축이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결국은 그 건축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부부가 살면서 서로 닮아 간다는 것도 사실은 같은 공간에서 오래 산 까닭에 그 건축에 맞는 삶이 되었고 결국 모습도 같아 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건축을 보면 그 속의 삶을 생생하게 짐작할 수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예컨대 고고학자들이 과거의 주거지를 발굴하고 환호하는 까닭도 그러하다. 내가 여행 하기를 좋아 하는 것도 낯선 곳이지만 그곳의 삶과 그 건축의 관계를 발견하는 즐거운 깨달음이 중요한 이유가 된다.
지난 추석 여러 석학들의 틈에 끼여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있는 중국의 국경 도시들을 답사하는 길에 오른 적이 있다. 한번도 세계의 중심에 서본 적이 없었던 소위 변방인 이 국경 도시들 속에서의 삶과 건축에 대한 상상력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여행 시작 며칠 후 나는 국경 도시에 서 있는 그들 건축들의 모습 몇을 보고 이내 실망해 버리고 말았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공동의 생활에 익숙해 진 그들의 집은 거의 같은 모양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건축에서는 같은 삶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진 나로서는 그들 모두가 복제적 인간처럼 보일 뿐 이었던 것이다. 도무지 개개인의 삶의 특성을 발견할 수 없는 일자형의 주택들이 어느 곳에서든 줄지어 있었다. 경제적으로 다소 개방되어 천민자본의 타락한 건축들이 급속도로 들어서는 것도 그렇지만 건축적으로 새로운 깨달음이 될 만한 게 도무지 없었다. 그저 우리네 어릴 적의 가난했던 풍경을 연상시키는 그런 슬픔이 가득한 그런 정경만 카메라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集安)의 한 골목길에서 참으로 감동스러운 풍경 하나를 목격하게 된다. 여느 일자형의 집 처럼 맛배 지붕에 20 여 미터 길이의 단층 공동주택 건물 앞을 지나다 일곱 개의 출입문을 보게 된 것이다. 한 출입문이 한 세대임이 틀림이 없는 데, 이 작은 집들의 문이 죄다 다른 모양과 색깔을 하고 있었다. 어떤 문은 푸른 색이며 옆의 문은 철재로 되어 있고 문양도 있으며 그 옆의 문은 흰 색에 목재이다. 그 옆 문은 더욱 크며 그 옆은 더욱 섬세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 이들은 비록 이 초라한 공동주택에서 공동의 삶을 살고 평균적 삶을 강요 받고 있지만 이들 스스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 문의 모양을 통해 선언하는 것이었고 그들의 고유함을 강변하는 듯하였다. 확대하면 마치 우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증언 아닌가. 그렇다. 만세 만세. 결국 우리는 선한 의지를 가진 존재인 것이다. 작은 발견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커다란 가슴 울림을 오랫동안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