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의 건축, 건축 속의 자연-병산서원

주간조선

2003. 9. 18

서양 집들과 우리의 옛 집이 다른 점 가운데 중요한 것은 자연을 대하는 방법이다. 공간 배치에 관해 이야기하면 대체로 서양의 집들은 내부지향형이다. 방들은 거의 반드시 복도를 통해서 접속되어 있고 대개 중복도여서 겹방이 많다. 중요한 방은 바깥과 직접 연결되는 곳 없이 집안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데 그 방은 필경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이 사용하는 곳이며 둘러싸인 겹이 많을수록 세력가의 집이다. 바로 외부나 자연은 나를 해칠 수 있는 적이라는 생각 때문일 게다. 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기 위한 대상이고 건축은 외부로부터의 은신처(shelter)일 뿐이어서, 자연과 적대적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는 건축-이 개념이 그들 건축역사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옛 건축을 보면 대개가 방 자체가 홑겹으로 그냥 자연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방의 집합도 복도를 통하여 접하는 게 아니라 다른 방과 직접 연속되거나 바깥을 통하여 연결된다. 대청이나 툇마루 같은 공간은 내부인지 외부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외부의 자연에 노출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자연 속에 집이 던져져 있는 모습이다. 이는, 우리의 선조들에겐 자연은 결단코 정복대상이 아니라 공존해야 하는 가치이며 어떤 경우에는 섬김의 대상이었으므로 자연의 섭리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었다. 따라서 집은 다분히 외부지향적이며 앞 산과 뒤 산을 연결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집 자체의 모양에 대한 관심이 있을 수 없고 공간의 배열이 더 큰 과제였다. 그렇다. 우리의 옛 집들을 생각하면 하나 같이 그 생김이 다 똑 같다고 여길 지도모른다. 전부가 기와집 아니면 초가이며 목조의 구조에 회벽이나 한지를 발라 마감한 것이니 무어가 다르겠는가. 그러나, 이는 건축을 시지각 대상으로만 보는 과오의 결과이다. 우리의 옛 건축은 자연과 외부를 어떻게 건축공간화 시키는 가에 있으므로 그 건축이 앉은 장소에 따라 다 다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공간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일 수만 있다면 우리 건축이 갖는 지적 감성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하회마을의 끝 자락에 있는 병산서원은 단연 선두에 있다.

병산서원은 임진왜란 때의 명재상이었던 서애 류성룡(1542-1607)를 모시는 사액서원이다. 그는 의성 김씨 대종가를 지은 학봉 김성일과 함께 퇴계의 수제자로 성리학의 대가요 징비록을 지은 대학자였다. 또한 24세에 관직에 나가 49세에 우의정에 오르고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겸임한 당대 최고의 세도가였으니 풍산 류씨의 중흥자이다.
퇴계의 후계자로서 서애와 학봉이 그 서열을 다투는 바람에 서애는 호계서원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1572년 풍악서당에서 현재의 자리에 이건한 서당을 1607년에 중건하고 후예들이 1614년에 서애의 위패를 모심으로서 병산서원의 칭호를 갖게 되었다. 권력과 더욱 밀착했던 호계서원이 당쟁의 중심이 되어 대원군 때 급기야 서원 철폐령의 대상에 올라 없어진 반면, 병산서원은 다소 세력권에서 밀려 있었던 까닭에 건축적으로 오히려 내실화 되고 오늘날까지 건재하기에 이른다.

병산서원은 지리적으로 안동시내와는 물론 하회마을과도 절벽 같은 너들대벽을 두고 떨어져 있는 곳이다. 남쪽에 병산(屛山)이 우뚝 솟아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밑으로 낙동강의 줄기가 유유히 흐르는 고요한 곳이다. 따라서 공부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이며 오로지 자연과 마주하는 삶을 살게 되는 곳이다.
병산서원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가르치고 배우는 곳인 강의동과 서애 류성룡의 위패를 모신 사당부분 그리고 하인들이 머물면서 전체의 관리와 서비스를 담당하는 주소(廚所)가 그것이다. 물론 전체는 각 부분이 수행하는 기능에 맞는 규모를 유지하며 전체적으로 지형에 순응하면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중에서 우리의 관심은 강의동 건축이 구성하는 공간의 아름다움이다.
강의동은 네 개의 건물로 이루어지는데 맨 위에 강의를 하는 입교당(立敎堂), 그 앞에 좌우로 학생들이 기거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그리고 남쪽아래에 누각인 만대루(晩對樓)가 있어 5,60평 정도 크기의 가운데 마당을 감싸고 있다. 밖에서 보면 중첩된 기와지붕이 만드는 풍모가 경사진 지형과 잘 어울려 있지만 가만히 보면 만대루라는 누각의 길이가 다른 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과도하게 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 이랬을까. 이 의문은 마당에 들어가 입교당에 앉아보면 절로 나오는 탄성과 함께 풀리게 된다. 앞산 병산이 만대루에 가득 들어와서 마당의 한 쪽 벽면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만대루는 그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둥만 남기고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병산을 그 속에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그 크기는 마당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길이이어야 한 까닭에 긴 모습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건축은 프레임으로서만 존재하며 자연을 적극적으로 매개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입교당의 대청에 앉아 뒷벽의 목재문을 열면 병산은 마당을 타고 강당을 관통하여 뒷 마당과 장판고를 넘어 뒷 산으로 이어진다. 건축은 오로지 자연 속에 걸터 앉아 있지 자연을 막거나 닫거나 그 흐름을 거슬리지 않는 것이다. 기둥에 의지하고 걸터앉아 다시 병산을 보면, 병산은 이름 그대로 병풍 속에 닫힌 듯 펼쳐져 있고 시시때때로 물안개가 그 풍경을 변화시킨다. 틀림없이 사계절의 시간이 만드는 이 절경은 그 속의 갇힌 고요한 마당을 살아 숨쉬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만대루에 올라 병산을 바라보면 도무지 내가 건축 속에 있지 않고 병산의 녹색에 파묻힌 것 같은데 뒤를 돌아 보면 나는 마당을 두고 오로지 삼라만상의 본질을 논하는 자세가 되어 입교당을 마주한다. 역시 건축은 대상이 아니라 매개자일 뿐이다.
적당히 어긋나게 배치된 건물들은 아마도 직각이 갖는 부자연함을 슬쩍 부스러트린 결과이다. 어디를 보아도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결단코 흐트러지거나 방만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시 저 고요한 마당이 갖는 긴장 때문일 진대, 여기서 그 긴장은 단순한 침묵이나 그저 그런 고요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지향하기 출발점이 된다. 그렇다. 그게 학문하는 올바른 태도이며 그 장소가 바로 서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