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비석

2010. 12. 15

건축가에게 무덤을 설계하는 일은 그리 일상적인 직무가 아니다. 두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게다. 하나는, 무덤이라는 형식이 우리에게는 너무 고정되는 게 첫 번째요, 살아있는 이의 집을 설계하는 일이 보편적 직무라는 관념이 죽은 자의 거처를 설계 대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다 심각한 편견과 오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덤이라는 형식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그 죽은 자가 살아 있을 때의 주거형식을 본 떠서 만드는 것이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원래는 토벽을 둘러 만든 주거를 적층시켜 만든 마스타바의 표면을 경사면으로 한 결과이며, 이스라엘의 무덤은 거의 석실의 형태인지라 석재로 만드는 그들의 주거형식을 본 뜬 것이며, 여타 다른 지방의 무덤을 보면 그 지역 고유의 주거형식을 바탕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의 무덤도 초가와 산야의 형식을 본 뜬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서양의 납골당의 모양들은 죄다 그 시대 주택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 자고로 무덤은 주거의 다른 표현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무덤이 주거형식의 적절한 변용이라면, 모든 무덤이 마치 절대 불변인 양 고정적 모양을 고수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망자가 살아있었을 때의 기억을 도우는 형식의 무덤을 만드는 일이 더 합리적이다.■ 무덤은 망자의 거처이긴 하지만, 그게 망자의 건축으로만 남지 않는다. 오히려 그 무덤을 사용하는 이는 살아남은 자들이며, 그 무덤을 오고 가는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조명하는 일이 그 무덤의 건축이 수행해야 하는 목적이다. 따라서 당연히 무덤은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건축의 한 종류인 게다. 따라서 무덤의 설계는 건축가의 직능범위 내에 있어야 하며, 레베렌츠라는 건축가가 지난 세기에 설계한 스톡홀름의 공원묘역은 이미 유네스코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무덤은 어쩐지 기피의 대상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아주 천박한 욕망이 그 배후에 있다. 즉 무덤은 괴기한 장소라서 주거지 가까이 두게 되면 주거의 가격을 비싸게 매길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이런 천한 의식이 생겼을까? ■ 옛날 우리네 주거에는 종갓집이라면 의당 사당을 짓고 선조의 영혼을 가까이 모시는 게 자손 된 도리를 너머 삶의 정신적 가치를 드높이는 일이었으며, 조상의 묘역을 뒤 산에 두고 사그라진 육신이 모습을 그리워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게 경제개발이 광풍처럼 이 땅에 몰아친 다음 우리의 가치가 물신에 의해 완벽히 세뇌되고 전도되면서 그런 정신이나 영성은 남의 일이 되어, 급기야 우리에게는 천하디 천한 겉 거죽의 화려함에 몰두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 사회가 분별없고 몰염치하며 저급하다면 내가 과민한 것일까? ■ 서양의 도시는 일상의 거주지(아고라)와 함께 신이 사는 영역(아크로폴리스)과 죽은 자가 사는 구역(네크로폴리스)이 늘 같이 구성되었으며, 마을의 어귀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가득 줄지어 있는 무덤들은 당연한 일상의 풍경이다. 일본만 하드라도 무덤은 시내 한가운데 있어 늘 죽음을 가까이 하며 사는 탓에 그들의 도시는 어쩐지 경건하며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격이 있다. 우리의 도시와 마을이 난장판이 되어 가는 까닭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 노무현대통령의 무덤은 정확히 말하면 무덤이 아니다. 화장을 하셨으니 그 유분을 안장한 곳이라 납골묘의 일종이다. 그러나 '작은 비석'을 세워달라고 하셨으므로, 이는 기념할 시설을 만드는 것이며, 기념묘역이라고 하는 게 맞다. 기념비나 기념탑이라고 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의례 불끈 솟은 시설물을 떠 올리게 마련인데, 이는 우리의 의식 속에 봉건주의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있는 까닭이라고 여긴다. ■ 1986년에 독일 하르부르그에 나치의 만행을 기억하기 위한 홀로코스트 기념탑이 세워졌다. 12미터 높이의 사각형으로 된 이 단순하게 보이는 탑은, 그러나 매년 2미터씩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게 만들어져, 6년 후인 1992년에는 완전히 땅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6년의 기간 동안, 하르부르그 시민들은 납으로 된 탑의 표면에 자기 자신이 나치로부터 받은 고통의 기억을 기록하도록 초대받았으며, 낙서 같은 기억의 기록들이 탑 표면을 매우면서 이 탑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 탑을 만든 작가는 “우리가 기억하는 진실을 탑이 대신할 수 없다. 불의에 맞서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가진 기억만이 진실이다.”라고 이 사라지는 탑의 설계에 대한 변을 밝혔다.■ 그렇다. 어떤 기념탑이던, 그 기념탑은 기념하는 대상을 위한 것이 아니기 쉽다. 오히려 그 탑을 세운 자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설치된 기념탑은 결국 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그런 수직의 탑이 의문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이는 바로 우리가 봉건의식이라는 타성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대통령의 무덤을, 조선왕릉 같은 크기의 위엄과 바로크적 웅장함을 갖는 배치와 고전주의적 장식으로 저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을 수 있을 게다. 사실 지난 49재 때, 일부의 묘역만 완성하고 공개되었을 때, 나는 꽤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시달려야 했다. 도무지 초라하게 보이는 그 임시묘역이, 그런 봉건적 무덤의 형식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용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시로 전화하고 더러는 협박까지 당해야 했지만, 나는 이미 노무현대통령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작은 비석'이라는 남겨진 단어였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그 형상의 이미지 자체로 받아들였으나, 내게 이 '작은 비석'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물리적 형상이 아니었다. 기존의 모든 관습을 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타고난 아웃사이더였던 대통령의 절박한 삶을 암시하는 추상명사처럼 다가왔으며, 적어도 건축가인 내게는, 새로운 형식의 묘역의 디자인에 대한 노무현대통령의 조건이요 요구였고 설계의 키워드였다. 그래서, 대통령의 묘역은 우리 주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되었으며, 관습적이며 봉건적 풍경과는 거리가 있었고, 헛된 높이의 위엄을 부숴야 마땅했으며, 특수하지만 보편적이어야 했다. 어쩌면, 국민들의 절절한 애도와 함께 기부되어 바닥에 깔린 박석 하나 하나가 다 작은 비석이며, 이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람 사는 세상'의 풍경 속에 걷는 이들이 다 작은 비석들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의 풍경 속에 작은 비석을 세워줄 것을 유언으로 남기셨을 게라고 여겼다.■ 그래서 1주기에 맞춰 묘역이 완공되자 마자 나는 '노무현의 무덤-스스로 추방된 자들을 위한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책까지 내면서 이 묘역을 설명했다. 그것은, 노무현대통령께 드린 보고서였고, 남은 우리 모두를 위한 사용설명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