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지혜의 도시’

2007. 5. 24

제 대학생활은 7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지금은 서울산업대학이 쓰고 있는 태릉캠퍼스가 제가 다닌 학교였지요. 그 당시의 대학은 유신정국과 맞물려서 정상적 학교수업의 진행이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걸핏하면 휴교조치가 잇달았던 까닭에, 모두 합쳐도 기껏해야 1년도 채 안 되는 캠퍼스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당국의 캠퍼스 통합방침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던 학교는 관악산으로 모두 모이게 됩니다. 제가 관악산으로 이전한 모교에 강의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근데 강의를 나간 첫날, 도무지 생소한 학교에 왔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교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길 그렇게 기다렸음에도 그 학교는 저의 모교가 아니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가, 어떤 날, 서울산업대학에서 특강요청이 와서 가게 되었는데, 그 때 알았습니다. 그렇게도 푸근하게 느껴진 그 캠퍼스를 가진 서울산업대학이 바로 제 모교였던 것입니다. 너무도 기분 좋게 강의를 마치고 흐뭇한 심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의 20대 초반, 제 방자했던 혈기와 어설펐던 사고의 흔적이 태릉의 캠퍼스 곳곳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불확실했지만 미래의 제 모습을 끊임없이 그리다가 지우곤 했던 마당들, 가슴 벅차게 마주했던 1호관 2호관의 타워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난 길들 위에서 저는 저의 이상과 신념, 우정과 애정 더러는 분노까지 같이 키워나갔던 것입니다. 그 캠퍼스는 그러한 저를 용납한 사회였고 도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캠퍼스는 단순한 학교시설이 아니라 기억과 욕망을 같이 가지는 도시여야 합니다. 규모가 작든 크든 도시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구축됩니다. 도시는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농촌과는 달리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여 살기 위해 만들어진 인위적 공동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익의 추구는 서로 갈등하고 마찰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이런 이익 공동체를 견실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동의하는 공동의 규약이 필요합니다. 제도나 법, 상식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며 문서에서나 존재합니다. 그 규약들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곳이 도시의 공공영역입니다. 길이나 광장, 공원 등이 그러한 것인데 이 영역들이 잘 조직되어 있는 도시가 선진도시입니다. 만약 그 공간들이 봉건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면 봉건도시요 한 사람이 조정하도록 전제적이면 전제도시이며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으면 민주도시요, 문화적으로 풍요롭게 구성되어 있으면 문화도시인 것입니다.
사실 도시적 맥락에서 보면 그러한 공간을 한정하는 요소일 뿐인 건축물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 마당, 길 등, 도시민이 서로 만날 수 밖에 없는 공공영역이 더욱 중요하며, 그 영역들이 높은 질적 수준과 함께 조화로운 구성을 갖추어야 그 도시 공동체가 건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좋은 건축이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든다는 선언에 동의한다면 건강한 도시가 건강한 사회를 이룬다는 말도 진리이며, 교육을 위해 형성된 작은 도시인 캠퍼스도 이런 전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입니다.

저에게 대전대학교는 신도시였습니다. 제가 대전대학교와 건축으로 관련이 되면서 캠퍼스를 처음 가 보았을 때, 몇몇 시설을 갖추고 있었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아직은 어설픈 신생도시의 풍경이었습니다. 몇몇 시설들이 형성한 풍경들은 솔직히 말씀 드려 준수한 용모가 아니었지만, 자연환경과 주변 풍광은 근사했고 더욱이 그 당시 이사장님을 비롯한 학교 운영진이 보여준 더 나은 학교 만들기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대전대학교가 새롭게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진지함이 저와 이 일에 함께 참여한 민현식교수를 감동시켰으며 저희는 이 캠퍼스의 재창조를 위해 각오에 각오를 다져야 했습니다.
민 교수께서 주도하셔서 만든 대전대학교 마스터플랜은 이를 위한 출중한 교본이었습니다. 그 속에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가치에 도전하는 대전대학교의 미래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으며 작은 도시로서의 캠퍼스 구축을 위한 세밀하고 단아한 규율들이 적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스터플랜에 따라 새로운 시설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이제는 건축적으로도 국내외의 뜨거운 시선을 받는 의미 있는 풍경의 캠퍼스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대전대학교의 마스터플랜을 완성시키는 기념적 건물이 건립을 기다리고 있는 듯 합니다. 저는 이 기념적 건축이 일개 건축으로 완성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보다는 이 건축을 통해 대전대학교라는 작은 도시가 완성되기를 희망합니다. 즉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인 공공영역들이 이 건축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기존의 공간들이 연계되고 합쳐지며 조직되어서 이 도시에서의 삶-캠퍼스 라이프가 더욱 유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학우끼리 교수님끼리 학생과 교수님끼리 모든 구성원의 관계가 더욱 두텁게 될 것이며, 그 두터운 기억이 캠퍼스의 모퉁이마다 남게 되면 대전대학교라는 도시는 단순히 교육행위를 하는 지식의 도시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을 일구는 지혜의 공동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사실은, 도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태어날 뿐이며 변할 뿐이고 끊임없이 전개될 뿐입니다. 캠퍼스라는 시설은 그 전개되는 학교공동체를 위한 하부구조일 뿐이며 정작 중요한 것은 학교구성원들의 공동체적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마스터플랜이 완성된다는 말은 사실 이 도시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선함과 아름다움과 진실됨을 어느 곳에서든 발견할 수 있는 공동체의 도시-지혜의 도시, 대전대학교가 그런 곳일 것임을 확신합니다.

그런 도시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저는 남과 나눌 수 없는 지극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