쟈코메티의 불안, 내 건축의 출발

조선일보

2003. 8. 20

지난 1989년 말, 오로지 김수근 건축의 구현을 위해 백병전 치르듯 한 15년의 삶을 덮고 그 문하에서 막상 독립을 하자 내 건축은 물론 내 삶의 정체성까지 두터운 안개 속에 파묻힌 것을 알았다.
불안과 고독 속에서 더듬거리며 두어 해가 지나고 있을 때, 한 작은 책자를 손에 접하게 된다. Matti Megged가 쓴 ‘Dialogue in the Void’라는 이름의 이 책 속에는 조각가 알베르토 쟈코메티와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작업을 비교하며 그들 사유의 근저가 인상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실패에 대한 강박관념의 끝에 다다르고야 조각이나 글의 시작이 전개되는 두 거장의 ‘불안’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책을 읽다가 나는 한 페이지에 눈을 고정시키고 말았다. 쟈코메티가 만든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장치를 찍은 사진이었다.
쟈코메티는 1961년 파리 오데온 극장에서 공연된 이 부조리 극의 무대를 위해 오직 나무 한 그루만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참으로 초라하고 보 잘 것 없는 나무였으며 나머지 공간은 철저히 비우게 하였다. ‘고도’를 기다리는 현대인의 불안과 고독이 극명하게 그려진 것이다. 그 비움은 쟈코메티 자신을 처절하게 제거한 결과였으니 침묵과 절제의 아름다움이었다.
처음 보는 사진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비움의 공간은 내 마음 속에 단단히 자리 잡고 말았다. 나는 그 이후 자코메티의 삶과 작업에 몰입하고 만다. 그의 작품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가서 봐야 했고 그에 관한 글은 접하는 즉시 읽어야 했다. 나는 서서히 그의 불안과 강박관념을 부둥켜 안기 시작한 것이다.
1992년,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4.3그룹’이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을 때, 나는 ‘빈자의 미학’이라는 화두를 걸고 내 건축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을 보였다. 그 때 출품한 ‘수졸당’의 그림에 등장했던 나무가 바로 쟈코메티의 나무였다. 그가 평생 가슴 속 깊이 품었던 불안이 소위 ‘승효상 건축’을 시작하는 데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