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아무개 집, 모헌(某軒)

2012. 3. 17

이 작은 집을 준공할 즈음 건축주 유회장이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즉각적으로 떠오른 단어가 '모헌 즉 아무개 집'이란 뜻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집이라는 의미였다. 유회장은 쾌히 수락했고 바로 중국의 서예가로부터 딱 어울리는 글씨를 받아 걸게 된다. 이 집은 이 이름이어야 했다.

모헌은 유회장이 경북대학교 부근에 40년 전에 지어 줄곧 살아 온 집의 부속채로 지어졌다. 40년의 세월을 도시 한 가운데에 있는 한 집에서 거주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여건도 변하고 생활풍속도 변하며 생각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격동하는 현대의 한국 땅에서 35년을 한 곳에 산다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원래 경북대학교 정문이 있던 지역인데 후문으로 그 지리적 여건이 바뀌면서 이 집 주변의 경제적 풍광이 쇠락해 버리고 말았지만, 이곳에 살면서 자수성가하여 대단한 철강기업을 일군 주인은 오히려 쇠락해가는 지역을 건축과 조경을 통해 회복하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일로 건너편의 땅을 사들여 일본정원을 정통한 방법으로 조성해서 특별한 장소로 남기는 일에 착수했다. 일본의 전통적 정원을 설계하는 일본인 가와기시(川岸松信)씨를 초빙하여 이를 실현하던 중, 이와 대비되는 한국정원을 또한 조성할 목적으로 기존주택에 접한 땅을 매입하여 나에게 그 건축설계를 의뢰하게 된다.
나는 유회장을 만난 지 10년이 되었지만, 그때까지도 서로를 익혀가는 조심스러운 처지였다. 크지 않은 일이라 해도, 내게 건축설계를 맡긴다는 것은 내 뾰쪽한 성깔을 아는 그로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일로 여겼을 게다. 실로, 필요한 기능만 전하고는 모든 일을 내게 맡긴다 했고, 한국정원의 설계하기 위해 정영선선생을 소개했을 때도 본인 스스로 조경에 대해 일가견을 자부하는 터여서 수락을 했지만 마지못한 듯 했다.

내가 설계할 집은 본채의 부속채로서 게스트룸의 성격으로 쓰겠다고 했다. 즉 침실 하나와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여 조성되는 정원을 즐기며 식사할 수 있는 사랑채가 그 프로그램 전부였다. 나는 이 부속채의 목적이 정원을 감상하는데 있다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될 수 있는 한 다양하고 풍요로운 공간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고 집은 그 공간들을 한정하기 위한 도구여야 했다. 땅은 100평 남짓하였지만 결국 4개의 마당을 만들게 되었다. 앞마당의 면적을 최대로 확보하기 위해 집을 뒤로 물리되 두 개의 레이어를 설정하였다. 식당으로 쓰이는 앞의 레이어는 투명하게 하여 뒤쪽 레이어인 침실에서도 앞마당이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 두 레이어를 연결하면서 생긴 두 개의 가운데 마당을 하나는 물의 정원으로 만들고 다른 하나는 선큰시켜 지하층까지 빛이 들어가도록 하였다. 연결 통로에서 보이는 침실의 창 밖에는 굵은 대나무가 심겨져 있는 작은 마당이 보이게 하여 공간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더했다. 식당의 창 내부는 나무패널의 가변 벽이 있어 필요에 따라 다른 형식의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투명한 식당 공간은 대지의 크기를 실제 이상으로 확대시키는 효능이 있었다. 그리고 대지 전체를 집의 높이와 같은 높이의 코르텐 강 담장으로 둘러 위요된 공간의 긴장을 극도로 높이면서 그 비워진 공간을 철저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정영선 선생의 처분을 기다렸다.
정선생의 조경은 유회장 뿐 아니라 나의 상상까지 뛰어 넘었다. 내가 정원의 면적을 극대화시킨다고 했지만 불과 9미터 깊이의 50평 크기 앞마당이 주된 것이다. 그러니 검은 코르텐 강을 배경으로 몇 개의 굵은 흰 줄기의 나무들이 솟는 풍경을 상상할 뿐이었는데, 정선생은 팥배나무를 그 작은 공간 속에 빽빽이 심고 바닥은 작고 거친 돌들로 가득 채웠다고 현장에서 연락이 왔다. 유회장은 극찬을 하며 빨리 내려와 볼 것을 종용했다. 궁금증이 증폭되어 내려가서 본 날, 그 강렬한 인상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본채에서 이 정원 속으로 코르텐 벽 앞에 직선의 길을 뚫고 화강석을 놓아 띄었는데 그 돌판을 밟자마자 마치 엄청난 크기의 숲 속, 혹은 원시의 자연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었다. 평소에 보잘 것 없이 여겼던 팥배나무는 현란한 붉은 색채를 뿌리며 정원을 채웠다. 마술이었다. 건축은 없어지고 조경만 남아야 된다는 나의 기대가 완벽한 성취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저 일본정원과는 전혀 다른 심원한 아름다움이 이 작은 공간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놀랍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전통 한실의 분위기가 농밀한 게스트 룸 대청에 앉아 들창을 열고 가운데 물의 정원과 그 너머, 투명한 식당 공간을 지나서 검은 코르텐 강으로 배경막을 친 돌의 정원이 이루는 풍경은 깊고 풍부하다. 건축이 스스로를 버린 결과일 게다. 감수성 예민한 유회장은 비 오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 눈 쌓이는 소리들이 여기에 내려 앉을 때, 내게 전화나 문자로 그 감동을 전했다.

건너편 일본정원은 정통적 일본 방식의 설계와 시공으로 완성된 상태로 이끼를 덮는 일만 남겨놓고 있었다. 원래 이곳에 일본초가의 다실이 지어질 예정이었지만, 모헌이 되어가는 꼴을 본 유회장은 일본 조경가를 설득해서 나에게 그 건축의 설계를 부탁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래야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정원은 하나의 쇼비니즘적인 소외된 풍경으로 머물 것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모헌과 연관되는 현대의 건축이 여기에도 있어야 전체 영역이 연결되어 오늘의 시대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도 건축은 부차적인 것이다. 작은 다실이 존재감을 갖지 않도록 시시때때로 변하게 하고 심지어 어떤 때는 사라지도록 만들기로 했다. 그래서 창호를 한지창과 유리창 그리고 루버창 등의 3중으로 구성하고 이들의 조합에 의해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했으며 때로는 이 모두가 감추어져 사라진다. 이 다실의 이름도 내게 구하였는데, 존재를 가지지 않는 어리석은 집이니 우정(愚亭)이라고 지었다.
이 다실과 함께 연못 건너에서 시점을 갖도록 기단이 설계되어 있어 대나무 마루로 이를 만들어 탄금대(彈琴臺)라 불렀고, 비록 공연이 없을 때도 이 탄금대와 우정은 서로 뭔가를 교감하는 듯하다. 이 정원의 설계는 시점에 대한 연결이 탄복할 만큼 노련했다. 정원의 적절한 위치에 놓여지는 사물들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사물이 다른 위치의 다른 사물과 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특별한 이야기가 서로 다르게 생겨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정원 어느 곳에 위치하든 응시하게 되는 풍경에 따라 많은 이야기들을 가만히 듣게 된다. 수간의 형상에 신비마저 느끼게 되는 오래된 소나무와 우리의 옛 석공이 만든 석등과 삼층석탑은 이상스러울 만큼 이 일본정원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우리네 심성에 관용이 깊이 베어져 있는 탓인가…
이 색다른 정원에 아무래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게 하는 낮은 문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유회장이 모아둔 옛날 석재를 가공하여 불로문(不老門)이라 장난스러운 명칭을 붙인 문의 설계를 추가로 했는데 만들어진 결과 또한 걸작이 되었다. 오래된 석재가 가진 시간의 결을 그대로 살려내어 그 자체가 불로의 조각처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묘역을 만들 때 석물의 장인으로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윤태중사장의 솜씨였다.

모두가 완성되어 갈 즈음해서 유회장은 본채의 내부개수를 민경식에게 맡겼다. 민경식은 오래 전부터 유회장의 공장이나 사무실의 건축과 인테리어 일을 맡아 하고 있으면서 이따금씩 유회장과 나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기까지 했는데, 본채의 내부개수 일은 그가 적격이었다. 그는 이 오래된 집의 벽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일본정원과 모헌을 감상하고 응시하는 장소로서 변화시켰다. 그러니 그마저 이 본채의 집이 존재감을 갖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정원과 모헌 그리고 본채, 전혀 다른 조형적 의지를 갖는 세 개의 영역이 이 본채를 통하여 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되게 되었다. 심지어, 모헌의 사랑채 끝에 앉아 쳐다보면 가운데 문을 통해 본채의 거실과 식당의 창을 지나 일본정원의 풍경이 보인다. 무려 60미터 길이의 시선이 관통되도록 본채를 손질하는 주도면밀한 솜씨를 민경식은 보여줬다.

이 전체 프로젝트 이름을 유회장은 본인의 호를 붙여 사야원(史野園)이라 불렀다. 사야라…그 정확한 뜻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컨데, 제도 안에 머물지 않고 그 밖에서 머무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관습적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반응하는 자, 변화를 재현하는 것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가 지식인이라고 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이야기를 빌리면, 유회장은 철저히 그 계열에 속했다. 사이드가 이야기 한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 성적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 보다 더 냉소적인 그는, 젊고 유능한 예술가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적극적으로 후원해왔고 세계 방방곳곳을 다니며 문화적 양분을 오감을 통해 섭취하며 이 땅의 척박한 문화예술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늘 무대 뒤에, 경계 밖에 머물기를 한사코 원하는 이이다. 그러니 그의 집 이름은 모헌(某軒)만큼 어울리는 다른 것이 없을 게다. 사야와 모헌…부재의 아름다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