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도, 도시의 지문

좋은생각

2006. 5. 01

도시의 지적도를 유심히 보신 적이 있는지. 규칙적 배열을 가진 신도시와는 달리 서울 같은 오랜 도시의 지적도는 매우 불규칙한 모양을 나타낸다. 옛 도시들은 무계획적이어서 그럴까. 그렇지 않다. 오래된 서양 도시의 지적도도 대부분 군대 막사처럼 규칙적이며 동양이라도 북경 같은 도시는 대단히 정형적이다. 그들은 새 도시를 만들 때 길을 먼저 긋고 집들을 길가에 나란히 배열하기 때문인데, 거의 직선일 수밖에 없는 길은 통행이 목적이므로 머무르기 위해서는 광장 같은 평면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그들의 도시는 선과 면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에 비해 우리의 오래된 도시에는 이 선과 면의 구분이 모호하다. 옛길들을 보면 같은 폭을 유지하는 길은 거의 없어 좁다가 넓으며 게다가 곧지도 않아 종횡무진으로 변한다. 통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놀기도 하고 쉬기도 하며 일하기도 하니 선도 아니요, 면도 아닌, 이런 길을 애초에 계획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인공적인 선과 면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산과 물이 정해 놓은 위치에 따라 적절한 장소를 택해 거처할 영역을 정하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며, 길은 그 사이에 놓여지는 자연스런 공간이었다.
예컨대, 서울을 만들 때 가장 중용한 장소에 궁궐 위치를 정하고 종묘와 사직을 좌우에 배치한 뒤 임금이 다니는 큰길만 대충 계획하고 적절한 장소를 택해 관아와 주거지를 두면 도시계획은 끝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모든 영역이 설정된 후에 형성되는 길이란 기점과 종점이 있는 선이 아닌 거미줄 같은 망이 된다. 또한 큰 땅은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집을 짓도록 단위로 갈라지면서 땅 모양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이 오밀조밀한 공간은 도시 속에서 온갖 모험과 좌절, 사랑과 배신, 낭만과 격정을 샘솟듯 하게 했으니 이런 도시의 삶이야말로 직선과 평면으로 구성되어 그 삶이 뻔했을 그런 도시보다 훨씬 건강하고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런 땅의 모양이 마치 우리 손의 손금과 지문 같아서 우리네 도시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요즘 자꾸만 서양의 도시 흉내를 내면서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이 지문을 지우고 있으니 우리의 운명이 달라질 게 분명하다. 못내 불안한데, 이게 또 나 혼자만의 강박증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