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건축 – 기오헌

주간조선

2004. 1. 01

내가 건축설계 작업실로 쓰는 집의 이름은 ‘이로재(履露齋)’이다. 직역하면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아름다운 뜻의 이 글자가 새겨진 현판이 내 방에 걸려 있다. 퇴색된 단청이 칠해진 틀 속에 품위 있는 글체로 쓰여져 대략 2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 현판을 내게 준 사람은 한국미술사학자인 유홍준 교수이다. 내가 그의 집 ‘수졸당(守拙堂)’을 설계해 주면서 답례로 그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을 내게 준 것이다.
유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로재의 뜻은 주역에 근거한다고 한다. 옛날에 가난한 선비가 연로하신 부친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른 아침 마다 외투를 걸치고 노부의 처소 앞에 가서 기다리다가 일어 나오시는 노부에게 따뜻해진 겉 옷을 입혀드린다는 내용이며, 그 노부의 처소까지 가는 길을 이슬을 밟는 길- 履露라고 칭 한데서 비롯되는 아름다운 고사이다.
나는 이 현판을 받고 그 때까지 사용하던 내 사무소의 이름을 이로재로 바꾸고 말았다. 그 후 10년을 넘게 사용한 이 이로재는 내 사무소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내가 건축설계를 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하며 내 사고의 근간을 만드는 일부가 되었다.
요즘에야 자기가 사는 집의 이름을 짓는다는 일이 극히 드문 일이 되어있다. 주거라는 명제가 우리가 사는 삶 자체여서 문화가 되어야 함에도 부동산 가치로 전락해 있는 현대에 우리의 집 이름은 건설회사 이름을 딴 아파트이거나 빌라 혹은 맨션과 같이 본 뜻이 전도된 이름이며 그것도 숫자로 번호를 부여 받은 게 우리의 거처이다. 로열층이니 팰리스니 하는 것도 죄다 주거를 환금성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결과여서 우리의 주거의 품위는 오로지 물신주의 속에 매몰되어 간다.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동의하든 하지 않든 이는 사실인데-그런 천박한 이름의 주거에서 만들어질 삶의 저급성은 불문가지이다.
서울의 창덕궁에 있는 기오헌(寄傲軒)이라는 이름의 집이 있다.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으나 광해군 이후 고종 때까지 정궁으로 쓰여져 왔다.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 전쟁이나 화재로 인해 많은 건축들이 소실되고 복구되어 왔지만 6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조선왕조 법궁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더욱이 근래 들어 내방객들을 통제한 결과 수목과 건축이 잘 보존되어 무질서한 도시 풍경과 공해로 뒤덮인 서울을 아직 지탱하게 하는 허파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다. 울창한 수목이 있는 후원에 가면 연경당(演慶堂)이 있는데, 이 집은 화려한 단청과 장식으로 치장을 한 궁궐건축의 형식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 집의 형식을 빌어 만든 99간 집이다. 순조28년인 1828년에 영민한 왕세자였던 효명세자의 청을 받아들여 후원에 지었다고 한다. 궁중생활의 격식에서 벗어나 일반인의 자유로운 삶을 때때로 즐기고 싶어했음 직도 했을 것이다. 물론, 궁궐 경내에 지어진 만큼 집의 조직은 탄탄하기 이를 데 없거니와 공간구성 또한 우리 옛 주거의 백미 같은 요소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내가 이 집을 가서 볼 때 마다 가지는 느낌은 아무래도 허전하다. 주옥 같은 전통 공간들이 오롯이 빚어져 있건만 왜 그런 마음이 항상 들까. 그것은 바로 이 집에서 이루어진 삶이 진실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이 집은 현실적으로 왕과 왕세자인 그들의 삶에 한갓 무대장치요 순간적 유희장소에 불과했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이 집은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리얼리스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이 집을 그리 좋아하는 건축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내가 이 창덕궁 내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축이 바로 이 연경당 맞은 편에 있다. 기오헌이다.
기오헌(寄傲軒). 무슨 뜻인가.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다 잡아보니 좁은 방안일 망정 편안함을 알았노라. (倚南窓以寄傲 審容膽之易安)” 의역해 보면 비록 좁고 작은 집 한칸 속에 머물지만 선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자 한다는 뜻일 게다.
이 말에 정확하게 대답하듯 아주 검박한 집이 연경당 맞은 편 언덕 위에 북향으로 두 채로 놓여 있다. 겨울에 눈이 오면 잘 녹지도 않았을 게다. 일자로 배치된 이 두 채 중 왼편이 기오헌이며 오른편이 의두각(倚斗閣)이다. 기오헌은 불과 온돌방 하나와 작은 대청과 누마루로 구성된 정면4간 측면3간의 집이며 의두각은 몸 누일 수도 없이 보이는 정면2간 측면1간으로 구성된 극히 단출한 집이다.
이 집은 효명세자가 즐겨 들러 독서와 사색의 장소로 쓰곤 했다고 한다. 그는 왜 이런 보잘 것 없는 집에 들러 그의 사유의 폭을 늘리려 했던 것일까. 두 말할 나위도 없이 ‘건축의 진실’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화려하고 장식으로 뒤덮인 궁궐의 건축에서 그는 진실한 자신을 잘 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렇다고 사대부의 집을 흉내 내어 지은 연경당의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도 그 당시 세도정치가들의 허위를 발견할 뿐이었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기오헌을 즐겨 찾은 이후에도 그는 의두각을 극히 작은 집으로 다시 지으면서까지 스스로를 진실로 발견하려 했던 것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등의 세도정치에 신물 난 부왕 순조의 명으로 불과 18세의 나이인 1827년에 조선왕조를 통치하기 시작했지만 4년 후인 22세에 삶을 마감하고 만다. 어질고 현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제왕으로서 참으로 아까운 삶이었다. 그는 아마도 헛된 이 세상의 삶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찍 나이에 맑고 맑은 건축 공간 속에 스스로를 담금질하였으리라. 그래서 짧은 시간일 망정 한껏 기품 있는 삶의 향내를 품으리라 다짐했을 것이라. 그래서 작은 집을 짓고 기오헌이라 이름 지어 거기서 머물기를 그토록 좋아 했었으리라. 진실을 담은 검박한 건축이었으므로……
오늘날 우리의 하나 밖에 없는 삶을 의탁하는 주거를 돈의 가치로만 따져 자신도 모르게 물신의 노예적 생활을 청하는 한국인들에게 나는 정말 이 기오헌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우리 속에 사라진 선조들의 향내 나는 삶의 품격을 다시 살리고 싶다. 내 사랑하는 이웃들의 정신적 몰락을 보는 것이 너무도 가슴 아프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집들의 이름을 이제 다시 지어보는 것이 어떤가.
당신은 당신의 집을 어떻게 이름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