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건축

2009. 7. 29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기독교신자였다. 기독교 신앙이 독실한 부모님 덕으로 어렸을 때부터 종교는 내 생활과 밀접하였다. 집과 붙어있는 교회의 마당은 내 놀이터였고 교회당은 안식처였다. 심지어 교회당의 작은 방에서 공부하며 자랐으니 내 어린 시절은 교회생활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자연적으로 내 심성은 기독교의 분위기 속에 성립되었으며 神과 靈性에 관한 문제는 어릴 때부터 나에게 근본적 질문이 되었다. 그리고 건축가로 성장한 지금에, 이 문제는 내 건축 속에서까지 그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 살아 있는 인간은 魂魄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魂은 영어로 spirit 이라고 하며 魄은 soul이라고 한다. 이 둘은 같은 것일 수도 있으나 다를 수도 있다. Soul은 육체와 함께 움직이지만 spirit은 따로 움직인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마음(soul)을 가지고 온 몸(body)을 다하여 어떤 일을 이루려 할 때에 모든 것이 다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이, 이 따로 노는 spirit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원리다. ■ 본래 타락한 존재인 인간의 혼은 惡靈(evil spirit)의 지배를 받으므로 聖靈(holy spirit)의 도움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령의 도움 혹은 신의 권능을 꾸준히 갈구하며 스스로를 겸손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 靈的 成熟이며 이는 바로 종교생활을 의미한다. 眞理 앞에 겸손하고, 義에 주린 자가 되고, 사랑에 목마른 자 되며, 和解와 一致에 앞장 서는 자 되라는 이 이야기는 내가 어릴 적 수없이 들었던 말이며, 그를 위한 節制와 儉朴한 생활은 당연한 규율이었다. ■나는 학생시절을 한국의 암울했던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보냈다. 수 많은 학우들이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거리로 나갔고 더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한 나도 이 대열에 곧잘 동참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반정부 학생 데모대의 가장 중심에 서 있던 한 선배가 나를 불러 대열에서 이탈하여 건축공부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그 선배도 건축과에 재학 중이었는데 왜 내게 그런 말을 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다. 대장이었던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나는 길거리와 광장을 떠나야 했다. (그 선배는 나중 결국 죽고 말았다.) 나는 모든 세상과 결별해야 했으니 오로지 건축만이 유일한 도피처였다. 길거리 함성이 크게 들릴수록 악을 쓰며 건축 속으로 파고들었다. ■ 졸업한 후는 더 했다.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 세상과 철저히 결별하고 살았다. 사무실에서 숱한 날들을 밤새우며 몸을 혹사시켰고 더러 시간이 남으면 술 속으로 들어가 탐닉하며 스스로 정신을 잃게 했다. 자학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내 생명을 지탱시켜 준 게 건축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건축이 종교였다.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주사회가 도래할 무렵 김수근선생도 병환으로 별세했으니 나는 갑자기 승효상 건축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무려 15년 동안 김수근 건축을 추종했던 나는 이미 내가 아니었으므로 급격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두 개의 건축을 만나게 된다. 이는 내 건축을 찾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첫째의 건축은 서울에 있는 ‘종묘’이다. 서울은 600년 고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개발 지상주의자들의 광풍이 불과 지난 3,40년 사이 서울의 동양화적 아름다움을 왜곡된 서구의 도시이론으로 황칠하고 덧칠하여 도시는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고 고요한 풍경은 온갖 악다구니의 모습으로 개벽되고 말았다. ■도처에 물신주의의 망령이 꿈틀대는 이 서울 속에, 그래도 부패한 서울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장소가 있으니 여기가 종묘이다. 종묘(宗廟). 서울의 한 복판 종로에 면해서 5만6천여 평의 면적 위에 오늘날까지 그 기능을 잃지 않고 조선왕조의 신위들을 모시고 있는 이곳, 종묘는 일그러진 서울의 중심성을 회복하게 해주는 경건한 장소이며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인 비움의 미학을 극대화하고 있는 건축이다. ■유교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조선왕조는 그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개국을 하자마자 경복궁의 양 측에 사직과 종묘를 만든다. 한양으로 천도를 한 이듬해인 1395년 9월에 종묘정전(宗廟正殿)이 7간 규모로 창건되었고 이후 몇 차례 증 개축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에 이른다. ■종묘정전은 우선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이 두른 이 정전은 예상을 깬 그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정문인 남쪽의 신문을 들어서면 한 눈에 들어 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이 지면을 깊게 누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 색의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 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된다. ■일본의 한 건축학자가 이 건축을 보고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극찬하여 수 많은 일본의 건축가들과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하기도 하며 동일한 감탄사를 토로했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파르테논 같은 외관의 장중함이었을 게다. 그러나 종묘정전의 본질은 정전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 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가이 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그렇다. 가로 세로 109미터 69미터의 월대(月臺)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비움 자체이며 절대적 공간이다. 1미터 남짓 하지만 이 지대는 그 사방이 주변 지면에서 올리어진 까닭에 이미 세속을 떠났으며, 담장 너머 주변은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있어 대조적으로 이 지역을 완벽히 비워진 곳으로 인식하게 한다. 마치 진공의 상태에 있다. ■제관이 제례를 올리기 위한 가운데 길의 표정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듯 하며, 불규칙하지만 정돈된 바닥 돌판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 도무지 일상의 공간이 아니며 현대 도시가 목표하는 기능적 건축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물신주의와는 반대의 편에 있으며 천민주의와는 담을 쌓고 있다. 바로 이는 영혼의 공간이며 우리 자신을 영원히 질문하게 하는 본질적 공간인 것이다. ■1990년 초 내가 내 정체성에 의문이 들었을 때, 이른 아침 이 종묘정전의 비움 속에 스스로를 던지며 들었다.. 탐욕을 지우고 혼돈을 걷으며 저 깊이에서 들려오는 맑은 영혼의 소리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 무위였으며 궁극공간이었고 무한침묵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내 건축의 방향타를 움켜 질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샌디에이고(San Diago)에 있는 소크연구소(Salk Institute)를 방문하게 된다.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이 건축은 가운데 비어 있는 마당을 두고 두 연구동이 양 편에 도열하여 빈 공간을 태평양으로 연길시킨 불후의 명작이다. 이 건축에서 이 비움의 마당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시각에 따라 변하는 태양과 그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의 농도와 깊이에 의해서, 변하는 계절에 따른 하늘의 색깔에 의해서, 기후에 따른 바다와 하늘의 변화하는 표정에 의해서 비워진 마당은 수시로 다른 표정을 갖는다. 그리고 방문하는 이들의 주장과 관념에 의해서, 거주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변하는 기쁨, 노여움, 사랑, 즐거움에 의해서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 ■ 이 마당은 더불어 무한히 열려있으며 때로는 어두운 색으로 변한 하늘의 벽으로 닫혀진다. 아마도 일몰의 시간이면, 태평양의 수평선은 불타는 벽으로 나타날 것이며, 하루의 이 마지막 시간이야말로 칸이 줄곧 추구해 온 절대 공간, 본질적 공간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건축의 장엄미일 것이다. 실로 이는 비움이 갖는 절대미학이었으니, 수 천년 동안 채우기를 목표 삼아 온 서양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비움, 이 용어는 이제 서양의 현대건축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의 키워드가 되어 있지만, 이는 본디 우리의 선조들의 상용어였으며 우리의 옛 도시와 건축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비움은 추방해야 할 구악이 되었고 채우기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도시는 악다구니하는 한갓 조형물과 건조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우리의 삶과 공동체는 그래서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것 아닐까. ■좋은 건축과 건강한 도시는 우리 삶의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일깨워지고 확인될 수 있는 곳이며, 그것은 비움과 고독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물신의 탐욕이 과도히 지배하는 이 시대에 잃어버렸던 우리의 고독을 다시 찾아 이를 마주하고 우리의 근원을 다시 물을 수 있도록 비워진 곳, 그런 비움의 도시가 결국 우리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이며, 종묘의 마당은 이에 선언이었고 소크연구소는 그 증명체였던 것이다. ■ 그렇다 도시와 건축의 아름다움은 채움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다. 나는 이 두 건축을 대하면서 온 몸이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내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는 그들의 언어가 아니었다. 내가 어릴 적 항상 나를 평화하게 했던 나의 언어였고 나의 몸짓이었던 것을 다시 깨달았던 것이다. ■모더니즘의 퇴조 이후, 우리 시대를 이끄는 중심적 사조가 사라졌다. 아마도 이제는 더 이상 어떤 사조가 전 세계를 주도적으로 자리잡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정보를 독점할 수 없는 시대인 한, 백가가 쟁명하는 때이며 만인이 만인과 투쟁해야 하는 때다. 그래서 인지 건강한 담론이나 중심적 철학의 논의 보다는 우리의 촉각과 시각을 자극하는 건축과 도시가 앞 다투어 전 세계에 나타나고 있다. 이유없이 뒤틀리고 비뚤어지며 기발한 재료로 싸고 감으며 요란한 색채로 장식하여 땅을 유린한다. 이게 현대건축의 주류처럼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건축이 껍데기를 붙잡고 이리저리 둘러대며 현혹하여도, 물신에 유혹당해 온갖 모양으로 뒤틀려 우리의 감각을 자극해도, 그것은 육체에 한정된 일일 뿐이며 본질이 아니다. 그 속에 건강한 영혼은 거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건축은 우리를 성숙시켜줄 수 없다. 영혼이 거주할 수 없는 건축, 그것은 박제이며 세트일 뿐이다. 건축 속에 영혼이 거주하게 되면 그 건축은 장소를 떠나고 시대를 떠나서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그 건축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기점을 다시 확인하게 되며 언제든지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이 미숙한 시대에 사는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며, 그런 건축을 진실의 건축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