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삶을 위한 집

국방일보

2003. 4. 07

의식주가 우리 인간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 요소인 만큼 집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거의 같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주택은 얼마만큼 옛 보다 발달하여 있을까. 원시시대와 현대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문명의 차이가 있으니 주택도 괄목할 변화를 이루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는 오산이다. 축구 잘하는 카메룬이라는 아프리카 국가의 한 부족의 주택은 텔레비전 같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원시상태의 주택과 같은 구조 속에 산다. 세계 곳곳에 있는 옛 주거의 형태는 인터넷 정보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여전히 유효하며, 문명화 된 도시도 주택의 변화는 다른 분야에 비해 지극히 더디다. 예를 들어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주택인 아파트의 평면을 보면, 2천년 전 로마시대에 있었던 집합주택 평면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사는 형태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지금이 옛 보다 다른 밥을 먹는 것도 아니며 낮에 일하고 밤에 자는 일이 그대로 임에야 우리의 삶을 담는 공간도 그리 변할 게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서양인의 주거역사가 그렇다는 말이며 우리네 집은 그 변화가 엄청나게 컸다.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던 집에 대한 생각은 서양과 근본적으로 다른데, 그들에게 집은 은신처의 개념이어서, 비바람이나 맹수들의 습격으로부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의 침입으로부터 자기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다. 외부공간과 자연은 당연히 적대적인 것이므로 집 내부에는 외부공간이 있을 수 없고 외벽의 길이는 가장 작게 만들어 외부 접촉면을 최소화 하는 일이 우선이다. 넓은 땅에 집만 덩그러니 있는 풍경이 그래서 이다.
이에 비해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을 섬기는 대상으로 보고 친화하려 애를 썼다. 따라서 집은 자연과 조화되어야 마땅하며 외부공간과는 공존하도록 지어야 한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집이 둘러 있으므로 외벽의 길이가 길게 되며, 방들도 외부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공간이 통과하는 장치이다. 대청마루 같은 곳은 도무지 외부인지 내부공간인지 알 수가 없고, 처마 밑도 내외부를 분간하기 어렵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본래 방의 이름을 위치에 따라 정하였고 서양의 집처럼 기능에 따르지 않았다. 우리가 요즘 쓰는 거실이나 식당 침실이란 이름은 우리의 옛 집에는 없는 이름이며, 안에 있으니 안방, 건너편에 있으니 건너방, 문 앞에는 문간방, 심지어는 변소도 뒤에 있다고 뒤간으로 부를 정도로 철저히 위치를 지칭하였다. 이는, 우리의 집에 있는 모든 방은 정해진 목적에 따라 행동하는 곳이 아니라 사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삶이 결정 되는 창조적 공간이라는 뜻이다. 이런 공간개념을 불확정적 공간이라 칭하며 바로 오늘날 세계 현대 건축계의 새로운 키워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수 천년을 지켜오던 이 생각을 불과 지난 40년 동안 서양의 집을 무작정 흉내낸 결과, 우리가 이제는 자연과 적대적이 되고 내부지향적이 되어 이웃과 연대하지 못하고 단절된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제, 건축이 우리의 삶을 만드는 말에 동의한다면 건강한 사회의 건설을 위해 우리들의 집부터 우리에게 맞는 주거형식으로 다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