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도시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근본적 질문

2004. 8. 22

신행정수도 건설이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드는 쟁점으로 부각되어 있지만 그 논의를 지켜보는 내 마음은 답답하기 이를 때 없다. 옮긴다 못 옮긴다가 초점이 된 이 논쟁은 각 개인과 단체의 이권투쟁일 뿐 도무지 본질을 벗어난 것이며, 논쟁을 통해 얻어지는 생산적 담론이 전혀 없는 허무한 싸움이어서 그렇다. 더구나 그 사이, 이제 물러설 명분이 없는 정부는 신수도 건설계획을 오히려 밀실에서 숨가쁘게 진행할 수 밖에 없어 그 결과가 편향된 가치로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해지는 터라, 더욱 답답한 것이다.
물론 정부는 신수도 건설이라는 회심의 프로젝트에 맞게 우리나라 최고의 인재들을 동원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정부가 정한 일정에 동의하고 그 순서에 맞춘 아젠다들을 하나씩 해결해내는 사명을 부여 받은 테크노크라트이거나 전문가들이어서 큰 질문을 던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인가, 이런 대역사의 주제어가 상생이나 도약 같은 유치한 용어와 생태니 환경 같은 진부한 구호로 가득 차 있으니, 도무지 한 나라의 수도를 만드는 개념으로는 그 철학이 너무도 빈곤하고 초라하다.
이제껏 우리의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그랬다. 대부분의 신도시들이 정치적 동기에서 발의되고 자본의 탐욕이 가세하면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이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나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근본적 추구 없이 서양에서 빌어 온 낡은 교과서를 들이대어 복제하듯 집단 주거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4,50만 인구가 사는 도시를 불과 4,5년 만에 만들었다고 그 무지막지한 속도를 무용담처럼 자랑했을 뿐 변변한 도시이론 하나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의 도시가 어떻게 되었던가.
우리가 만든 건축이 결국 우리의 삶을 지배하여 바꾸듯 도시는 우리의 사회를 다시 만든다. 민주적 도시에서는 민주적 사회가, 봉건적 도시구조에서는 봉건적 사회가 잉태될 수 밖에 없는데,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극심한 대립과 갈등의 많은 부분이 우리가 사는 잘못된 도시구조에 기인하고 있는 것 아닐까. 위계적으로 구성된 도로들, 등급화 된 토지들, 도심 부도심 등의 계급적 용어들, 이들이 만든 도시가 우리를 나누고 계급화 시키며 그래서 계층끼리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행정수도건 진짜수도건, 새로운 수도 건설이라면 두 가지의 근본적 논점을 해결하지 않고는 지난 시대의 도시와 다를 바 없다. 하나는 국가와 수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도시와 우리의 삶에 대한 관계인데 이는 근원적이고 본질적 문제이다.
수도라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과연 무엇인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과거 절대군주가 살았던 수도는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야 했고 다른 도시는 그 하위의 이익 공동체가 될 수 밖에 없었지만, 민주적 사회를 지향하는 오늘날, 더구나 초고속 정보 네트워크에 의해 모든 조직 간의 공간 개념이 점점 사라지는 지금에 수도라는 개념이 국가에 여전히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존재해야 한다면 그 성격은 여전히 중앙집중적이어야 하나. 하나가 아니라 여러 곳에 두면 안되나. 세계의 지정학적 세력권 속에 그 규모와 위치가 적정한가, 통일 이후는 어떤가, 서울은 무엇이 되고 부산과 광주는 어떤 관계가 되는지……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문제가 있지 않은가.
이것은 옮기자 말자의 근시안적 이해가 아니라 우리의 국가 시스템에 관련된 문제이며 우리나라의 미래형태에 대한 현안이건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만드는 수도의 그림은 안 봐도 뻔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또 청와대를 맨 윗머리에 두고 행정조직처럼 도시구성을 그리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그림은 봉건의 잔재이며 시대를 거스르는 파행적 도시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이 도시를 만들면서 도시라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의 도시적 삶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논의가 중요하다. 그래서 과거 우리가 엉겁결에 만들었던 도시를 반성하고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이어져 이 땅을 위한 새로운 시대 정신을 만들 계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런 논의는 도시와 건축전문가들 사이에서만 논의될 사항이 아니다. 사회학자나 인류문화학자, 철학자 혹은 역사학자 등을 참여하게 하여 우리 삶의 형태를 탐색하는 인문학적 사유가 전제되어야 하며, 뜨거운 논쟁과 담론이 형성된 후 그 사유를 기초로 삼아 계획과 건설이 이루어지면 그 도시는 천년 도시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말 다시 부탁하고자 한다. 나는 행정수도를 만드는데 찬동한다. 아마도 한반도의 단순한 지정학을 중층 구조로 만들 기회가 된다고 여기며, 국가적 관심사가 된 이 신 수도의 건설이 잘만하면 도시 차원을 너머 새 시대 새로운 문화가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시간에 쫓기어 인문적 담론 생산의 공간을 묵살한다면 그것은 지난 날 탐욕스럽게 만든 신도시 또 하나 급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도시가 아니라 집단 이주지이며 문화가 아니라 정신을 배제한 토목사업일 뿐이다. 내가 반대할 수 밖에 없는 도시다.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고 바로 세우도록 우리 모두가 열광해 마지 않는 근사한 레토릭으로 천년도시를 만들자. 그게 우리의 푸른 미래인데, 이를 가로 막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