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중곡동 성당

2001. 5. 13

지난 1996년 6월부터 설계가 시작된 이 중곡동 성당은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초에 완공되었다. 옛날에야 성당을 짓는 일에 5년이라는 기간이 긴 기간이 결코 아니지만 요즘으로는 사뭇 길다. 이 기간은 또한 한 건축가의 사고 내용이 충분히 변할 수 있는 기간이어서, 5년이 경과한 후에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낯 뜨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러는 기억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마침 지난97년 모 건축월간지에 이 중공동성당의 설계진행과정을 필드노트라는 형식으로 생중계를 하겠다고 연재를 시작한 적이 있어 이를 토대로 설계 당시 가졌던 중요한 생각들을 소개 하고자 한다. 이 생각의 편린들은 완공된 실제의 모습과 다른 것도 있으며 심지어는 지금 내가 가진 생각과도 다른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생각들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중요한 배경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고딕과 종교적 건축
동 서양을 막론하고 건축의 역사 속에서 종교건축은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자신의 삶과 죽음을 주관한다고 믿는 신에 대한 봉사 중에서 그 신을 모시는 건축을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것이며 더욱이 이 일은 선택 받은 자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도 최고의 건축가가 이 일을 위해 뽑혀졌으며 그 종교건축은 당대 최고의 지식과 기술이 동원되어야 하는 일이었고 최고의 예술적 성취가 이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성사였다. 서양건축의 변천사가 대체로 종교건축의 발달사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탁월한 종교건축의 성취는 물론 고딕양식이다, 거대한 높이의 벽과 가느다란 피어 사이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과 그로 인한 교교한 음영이 만드는 경외롭고 신비한 고딕성당은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최고의 존경이었으며 이는 중량과 공간에 대한 건축가의 승리에서 비롯되었다. 미미한 인간이 지고의 신에게 바친 존경. 이렇게 이루어진 고딕은 그 이후 전 지역과 전 시대에 걸쳐 지어져 왔으며 인간의 존재가 더 이상 미미하지 않게 된 현대에서도 고딕은 교회의 상징이 되어 있다. 역량 있는 많은 현대의 건축가들이 만드는 종교건축 대부분이-그가 비록 정통적 고딕의 형태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을 하드라도 결국은 고딕이 갖는 위엄과 신성의 범주 안에 있으며 또한 대다수의 교인과 성직자들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형식임을 믿는다. 오히려 고딕의 뾰족탑에서 신성이 비롯되는 듯한 가치 전도가 더욱 많은 지지를 얻고 있기도 하다. 내가 믿기로는 이는 종교-특히 기독교나 천주교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그들이 말하는 ‘종교건축’일 지는 몰라도 종교의 본질에 접근하는 ‘종교적 건축’은 아닐 수 있다.
이는 내가 종교건축을 대하면서 대립해야 하는 많은 과제 중에서 첫 번째의 것이다.

샤만의 종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쩐지 다른 나라 사람들 보다 종교적이다. 어디에도 신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생사화복의 근원이 그 신에서 비롯된다고 철두철미 믿는 백성들이다. 하늘에도 산에도 땅에도 바다에도 나무에도 돌에도 집에도 심지어는 방 마다에도 다른 신들이 있다고 믿는다. 태어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온갖 일상사를 무신의 주도 아래 그 길흉을 조작 시키기를 원해 온, 샤머니즘의 지독한 영향 속에 가두어진 민족이다. 전래되었으나 우리의 전통 문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 불교나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큰 위세를 떨치는 한국의 기독교도 이 땅에 들어와서 미상불 이 땅에 가득 찬 샤머니즘과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물론 전교를 가장 큰 사명 중의 하나로 하는 종교의 목적 상 그 지역에서의 토착화를 위해 어느 정도 그 지역의 특수 사정과 타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타협이 그 종교의 본질을 넘나들 때 우리는 이를 사이비라 하며 이는 이미 타락한 종교이다. 이 타락한 종교는 그의 정통성을 강변하기 위해서 온갖 증거를 조작하려 하며 이 조작된 증거를 상징화하려 한다.
상징과 부호에 몰두하는 종교는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야만 믿게 되는 종교이다. 이런 종교는 결국은 육체의 안위와 일신의 영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는 해탈이나 구원 나아가 자비나 사랑의 실천 같은 종교의 본질적 요소를 흐리게 한다. 그렇다. 내가 그려야 하는 건축이 샤만의 건축이 아닌 이상 종교 건축에서의 상징과 부호 또한 내가 극복해야 하는 중요한 건축 과제이다.

지역 공동체, 신앙 공동체로서의 성당
중곡동 성당은 도시 내에 있는 성당이다. 순교지를 기리는 기념성당이 아니며 성사를 기념하는 순례자의 성당도 아니다. 말하자면 평범한 도시 성당이며 따라서 지역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하는 지역적 종교 공동체이다. 지역의 종교 공동체로서의 건축 공간은 전례를 위한 내부공간인 대성당 외에 분과활동을 위한 대소 교리실을 위시하여 관혼상제나 여러 이벤트, 혹은 교우 상호간의 교류를 위한 공간 등 다양한 종교 활동을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당건축은 이들을 내부의 층 별로 적당히 배분하고 소요되는 크기를 칸막이로 구획하여 배분하는 형식을 취할 뿐이다. 마치 신은 본당 내부에만 있고 이런 곳에는 임재하지 못하는 듯 비종교적 건축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역민들의 부족한 문화적 공간으로 그 성당이 전용된다 하여도 그 지역민들이 성당의 경내로 내딛는 순간 그 영역은 이미 경건의 장소이며 은총과 신비로 가득 찬 축복된 장소임을 확인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기둥과 벽체 하나에도 이 종교가 가리키는 의미를 담아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중요한 명제였다.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
내가 그렸던 초기안은 본당을 지하에 두고 길다란 경사로를 통하여 접근하게 한 것이다. 경사된 본당의 지붕은 지면을 뚫고 솟아 도로로부터 직접 연결되어 성당의 중심공간이 되도록 하였다. 이 경사진 외부공간은 때로는 옥외 성당으로 혹은 다양한 공연과 행사를 가능하게 하도록 적절한 크기와 경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위를 사제관과 수녀원, 교리실이 둘러싼다.
나의 지하 성당 안을 관찰한 성당 건축위원회의 의견은 엇갈린 모양이었다. 기존의 관습을 좇아 만든 성당과 새로운 실험을 놓고 오랜 시간 논의를 거쳤다. 아무튼 나는 선택되었고 몇 가지 새로운 지침의 수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이 설계안을 스스로 바꾼다. 전체 규모를 축소해야 하는 문제도 기존안의 볼륨은 유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내가 나의 개념을 위해 만든 모든 장치들이 그 작위성을 노골적으로 들어내는 듯 보이는 게 꺼림직하게 작용하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가장 중요하게 생각된 곳이 축복의 햇살이 가득 내리는 듯한 교회 마당의 정경이었다. 이는 내가 어릴 적부터 잊지 못하는 추억의 한 부분이기도 한데 이를 만들 수가 없어 지상으로 다시 본당이 나오게 된다.
넓지 않은 마당을 유용하게 쓰려면 모든 동선이 이 곳에서 모여지고 흩어져야 한다. 따라서 사무실이나 만남의 방 등 많은 동선이 모이는 기능을 이 마당과 같은 레벨에 두고 본당을 들어 올리면 하는 수 없이 교리실 등의 시설들은 지하에 위치하는 기존의 성당을 답습할 도리 밖에 없다.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이 교리실의 통풍과 채광의 조건이다.
그러나 본당에 접근하기 위한 데크와 마당의 공간은 이 가운데 외부 공간을 드라마틱하게 조우하게 한다. 만남의 방과 데크 사이의 3m 폭의 갤러리 공간을 통하여 마당으로 연결되는 뒷 도로에서의 접근은 이 성당이 이 도시 속에 견고히 세팅되기 위한 필수적 장치이다.
언젠가 명동성당의 한 주교가 이야기한 단어의 배열을 잊을 수 없다, 그 분은 성당을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이 가득한 거룩한 장소라 했다. 부르심의 기적과 응답의 은총. 되뇌일수록 참 아름다운 말이 아닌가.

성소
본당은 길다란 직사각의 평면이다.-‘화해’가 전례의 중요한 목표가 되는 본당의 평면 형식은 현대에 접근하면서 다양한 형태가 시도되어 경우에 따라 공동체의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한 사례가 많이 있으나 회중의 숫자가 많아 지면 원형이나 방사의 평면은 아레나나 공연장처럼 될 위험이 있다. 이러한 공간에서 신성의 획득은 도달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주변 환경이 어수선한 까닭에 더욱 긴장된 공간을 대두 시킬 필요가 있었다. 원래의 설계에서는 솟아 오른 제단 뒷 벽은 3m 높이 위는 빛이 쏟아지는 유리벽이었다. 길다란 경사로로 지하로 진입하여 어두운 전실을 지나 본당의 문을 열고 본당 내부로 들어 간 순간 정면에서 쏟는 밝은 빛은 처음 찾아 온 이들에게는 확연히 구분된 성소 공간의 인식을, 다시 찾는 이에게는 그 구별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부를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제단의 활동이 더욱 잘 보여지기를 원하는 건축위원회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 유리벽을 막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아직도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아무 장식이 없는 벽체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생경스럽다. 이것은 일상적이 아니다. 이 당황스럽기까지 한 이 벽체에 신도들의 시선이 도달하여 오랫동안 쌓이면 그 자체가 귀한 성소가 될 것을 믿는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얼마 전, 성당건축도 신부 중에서 몇 명을 선발하여 전문적 건축훈련을 시킨 다음 성당건축을 전담시키는 방법이 카톨릭 교계 내에서 거론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거에도 건축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신부가 성당건축을 담당한 예가 있었다. 또한 그런 신부들이 설계하고 공사 감독한 몇몇의 성당들이 괄목할 만한 좋은 건축이었던 관계로 내부에서 발탁하여 쓰는 ‘건축 신부’의 효용성이 자못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참으로 위험하다. 그렇지 않아도 시대착오적 건축을 양산하는 불교건축의 반문화적 건축부재의 현상을, 한국의 현대건축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카톨릭마저 답습하기 시작할 수 있다. 아마도 꼭 그렇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물론 이런 논의의 배경은 전례가 중심이 되는 성당의 건축은 전례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신부가 건축훈련만 받으면 가장 잘 건축할 수 있다는 것이며 이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건축가가 잘못 설계하여 초래되는 낭비와 폐단을 없애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만 이해하기에는 건축은 너무나 복합적이며 포괄적 문제이다, 물론 신부도 좋은 성당을 설계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신부가 그야말로 참 좋은 성당을 설계하고 지었다면-건축의 본질적 측면에서도- 그 신부는 신부 이전에 독립적인 의견을 가진 건축가이며, 그가 바른 건축가라면 그의 의견이 전체를 지배하여서는 안되는 것도 아는 지성인일 것이다. 지성인. 그렇다. 건축가는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보편적 세계를 바라보는 지성인이라고 한다.
지성인이란 누구인가.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지성인은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며, 보편성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실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들인 출신배경, 언어, 민족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안이한 확신들을 초월하기 위한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성은 또한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과 같은 문제에 직면해서도, 인간 행동의 단일 표준을 찾고 유지하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덧붙여 정의한다. 만약 우리가 사이드의 이 정곡을 찌르는 지성인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건축은 그 건축을 탄생시키는 모든 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축가가 그 건축을 담당하는 것이 훨씬 올바르며 그러함으로 그는 그 본질적 건축에 더욱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건축가가 따로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며, 그런 이들이 만든 그런 전문적 건축이 보편적 삶을 사는 뭇 대중에게 좋은 삶 터가 될 가능성이 별 없어 보인다. 성당 전문건축가, 병원 전문건축가, 주택 전문건축가, 그들은 성당과 병원과 주택을 알지는 몰라도 건축을 아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오히려 그러한 전문적지식과 견해가 건축이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삶의 터’라는 명제를 간과할 위험이 가득하다.
나는 어떤 프로젝트를 착수하면서 항상 먼저 풀어야 하는 숙제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프로젝트류 건축 속에서의 경험과 그로 인한 선입관념에 대한 검증이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검증과 의심에서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그것이 그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예가 허다해 왔다.
20 년 전인 지난 77년 마산성당의 설계로 김 수근 선생과 요셉 프랏츠 신부가 처음 만날 때의 일을 기억한다.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교구에서 재정을 지원하여 짓게 된 마산성당의 설계를 의뢰하는 이 신부에게 김 수근 선생은 자신은 크리스천이 아님을 처음에 전했다. 소박한 성당이 되기를 원한다는 신부는 그러함으로 기존의 성당과 다른 장소를 만들 수 있음을 얘기하며 서로 좋은 성당을 만들기로 다짐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그 후 선생으로부터 내가 듣는 질문은 ‘종교가 무엇이냐’,‘카톨릭이 무엇이냐’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태어 날 때부터 개신교도였으며 고등학교 때 까지를 교회와 더불어 생활했던 그래서 종교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 지식이 적지 않다고 여겼던 나였음에도, 선생의 그 본질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선생이 짐작하는 종교의 본질에 도달하는 건축을 그리기 까지 내가 알던 종교생활을 조목조목 되씹어 따져야 했고 내가 가진 잘못된 생각의 틀을 고치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받은 건축가로서의 참된 교육이었으며, 그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교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믿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좀더 건축을 중심에서 지켜볼 수 있는 방법일 것이며 그 결과 참 좋은 건축을 그릴 수 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