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술’이 만든 ‘反 건축’

대우건설 사보

1999. 10. 18

파리 퐁피두 센터의 시대적 성취

성서의 창세기에 천지를 만든 조물주의 영어 표기는 The Architect이다. 일반 명사인 건축가에 정관사를 붙이면 창조주가 된다는 말이다. 건축( Architecture )라는 말도 라틴어 어원을 따져보면 ‘커다란’ 혹은 ‘으뜸’이라는 뜻의 Arch와 ‘기술’ 혹은 ‘학문’을 일컫는 Tect라는 말의 합성어라고 하니 이를 받아 직역하면 건축은 ‘큰 기술’ 또는 ‘으뜸의 학문’이라는 말이 된다.
흔히들 건축을 설명하면서 예술과 기술의 합이라고 하는 경우를 본다. 삐딱하게 이를 들으면 건축이라는 것은 원래 있지 않았던 분야인데 예술의 일부와 기술의 일부적 요소가 합쳐져서 부수적으로 생겨난 직종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 마다 적지 아니 언짢게 여긴다. 건축과 예술, 혹은 건축과 기술은 엄연히 구분될 수 밖에 없다. 다만 건축을 예술적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 불과 외관이 예쁘고 밉고 의 문제가 아니라 그 건축을 이룬 창작 의지적 관점에서 본다면 건축은 엄청난 예술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을 조직하고 꾸미는 일이 건축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건물을 만들고 세우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우리의 문명을 지탱하는 진보의 차원에서 건축을 본다면 건축은 또한 엄청난 기술이다. 우리의 삶의 형식을 바꾸는 그런 큰 기술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견지하여 건축을 볼 때 건축의 역사에서 우리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가장 큰 기술은 어떤 사건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첫번째 대사건은 재료적 관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바로 로마인들이 발명한 콘크리트이다. 콘크리트는 오늘날에도 건축의 주재료로 쓰일 만큼 필수적 재료인데 이것이 이미 2천년 전 로마시대에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로마시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재료가 돌이나 나무 등의 자연 소재를 그대로 가공하여 쓰거나 흙을 햇볕에 말리거나 구어서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료 자체를 쓰는 1차 가공품인 셈이다. 그러나 콘크리트는 두 가지 이상의 자연재료를 채취하여 가공하고 이를 물과 혼합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킨 후 적정의 강도를 얻어 사용하는 ‘제품’이라는 사실이 그런 원시적 형태의 재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 재료는 반죽 상태인 콘크리트를 부어서 넣을 형틀만 있으면 재료의 사용이 장소에 구애되지 않으며 크기나 모양도 무한정이다. 즉 재료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지가 더욱 중요하며 따라서 작가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많은 건축가들이 이 재료를 선호하게 된다. 이보다 더 광범위하게 쓰이는 건축 재료는 아직 이 세상에 없다.

두 번째의 대사건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중세의 고딕양식의 완성이다. 고딕양식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첨탑이나 우아한 아치, 벽을 떠받힌 날렵한 거더( flying girder )들, 힘있는 부축벽 그리고 장미의 창이라는 스테인드 그래스의 황홀한 빛 등이 고딕양식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이런 화려한 양식을 이룰 수 있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프라잉 거더’ 라는 구조적 요소를 만든 구조형식의 완성이다.
건축은 중력과의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부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벽을 쌓고 지붕을 올려야 하는 일은 다름 아닌 중력에 대한 저항인 것이다. 육중한 무게의 지붕은 벽체에 의해 지지 되었으며 벽을 뚫는 일은 그 만큼 하중을 견뎌야 하는 벽체를 취약하게 만들 것이 뻔하므로 대단히 삼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건축기술이 모자란 고대의 건축일수록 벽은 두터우며 창문을 만들기 어려워 내부는 어두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암울한 공간을 가진다. 그러나 고딕에서는 볼트형의 지붕은 몇 개의 기둥에 의해서만 지지 되므로 지붕의 중력을 부담하지 않아도 된 벽은 단순히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기능만 담당하면 된다. 자연스레 큰 창문이 생겨나고 빛은 자유로이 내부로 흐른다. 바로 건축이 중력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 이후로도 건축에서 기술의 진보는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특히 산업혁명의 결과로 철과 유리의 대량생산 그리고 전기, 전화, 엘리베이터의 생산 등은 100층이 넘는 고층을 가능하게 했고 우리의 삶은 더욱 투명해 지고 수직으로 적층 되어 우리가 사는 도시는 더욱 다이나믹한 풍경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띄어 넘는 또 하나의 대사건이 이루어 지면서 현대의 건축은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열었다. 바로 퐁피두센터( Centre Georges Pompidou )의 출현이다.

1977년 고색 창연한 파리 중심부에 이 건축이 세워졌을 때, 아니 그 훨씬 전인 1971년 이 건축의 설계안이 국제설계경기의 당선작으로 결정되어 세상에 그 모습이 알려졌을 때 이 건축은 열렬한 지지와 극렬한 비난을 동시에 부르며 가장 뜨거운 논쟁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60년대 후반 세계대전의 참상 위에 유럽은 다시 경제 재건의 확신을 갖게 되면서 파괴된 도시를 복구한 이후 각국은 국가적 번영을 선전하기 위해 문화에 눈을 돌려 문화시설을 경쟁적으로 건립하기에 이른다. 이미 50년대에 런던에는 사우스 뱅크에 로열 페스티발 홀을 위시한 복합적 문화지대가 들어섰고 적국이었던 독일의 베를린에 까지 한스 샤로운과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설계한 보석 같은 음악당과 미술관이 60년대에 건립되고 있었다. 문화에 관한 한 최선진국이라는 자존심을 가진 프랑스인들이다. 그들은 다른 문화 경쟁국들을 띄어 넘는 문화시설을 가지기를 원했음은 불문가지였으며 이 건축의 건립은 대단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프랑스 국민의 관심 속에 드디어 나타난 이 건축은 그들이 그리던 건축이 아니었다. 지난 세기 에펠탑( 1889년 )의 결렬한 논쟁을 경험하지 않았던들 이 건축이 파리 도심 한복판에 서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상을 띄어 넘은 건축, 그러했다. 이 건축은 우리가 종래 생각하던 건축에 대한 약속과 믿음을 전부 파기하는 ‘반 건축’이었다.
우선 당연히 내부에 있어야 할 각종 설비 닥트나 배관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물론 기둥들도 전부 밖에 있고 심지어 에스컬레이터 까지 외부로 노출되어 있다. 인체로 비유하자면 내부의 장기들이 모두 몸 밖으로 나온 것이다. 건축의 내부를 조직하고 마지막으로 이들을 감싸는 건물의 외관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수 천년을 내려온 고전적인 건축 개념이 여기서 사라진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경제적이나 실리적 이유로 실제 시공은 되지 않았지만 내부의 층을 이루는 슬래브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하로 움직여서 층고를 다변화 시켜 층에 대한 개념을 없애는 것이 최초의 안이었다. 이것이 진정 건축인가.

도서관과 전시장 그리고 공연장이라는 복합 문화시설을 수용하게 되어있던 이 건축의 설계를 위해 설계경기에서 내건 프로그램은 융통성, 가변성에 대한 주제였다.
설계경기 당시 38세이던 리챠드 로저스( Richard Rogers )라는 영국인과 34세의 이태리 출신의 렌조 피아노( Renzo Piano )는 런던에서 고작 다락방을 개수한 적이 있는 무명의 건축가였다. 이 젊은 건축가들은 주최측이 요구한 ‘융통성( Flexibility )’에 주목한다. 그들은 길이 170m, 폭 48m 의 직사각형 평면을 기본형으로 하고 한 변에 13개의 철골 기둥을 두어 이를 지지하게 하여 내부 기둥을 전부 없애는 대담한 구조를 택한다. 내부를 완전히 비우기 위하여 실내 환경조절에 필요한 모든 설비 장치들을 외부로 내몰았으며 통로조차 외부에 위치시켜 주최측이 내 건 가변적 건축을 완벽하게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 해결책에는 고도의 정밀한 엔지니어링이 필요하였고 오버 애럽( Over Arup )이라는 걸출한 조직이 파트너로 참여하여 이 건축이 기술적 문제를 모두 해결하였다. 49개국에서 몰려든 681개의 응모안 대부분이 파리의 전통과 문화시설의 교과서적 모습을 변용하고 적당히 조합하는데 열중하고 있을 때 이 건축은 전혀 다른 세계의 건축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설계경기의 심사 위원들은 필립 존슨이나 오스카 니마이어, 장 프루베 등과 같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는 대 건축가들이었다. 그들의 심사평은 ‘이 건축은 우리 시대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걸작’ 이라는 것이었다. 물론이다. 이 건축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현대건축은 ‘하이 테크놀러지’의 시대를 열게 된다.
구조 방식도 유니크하며 설비도 최첨단이고 모양도 특이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이 테크놀러지라는 말을 쓰는 게 결단코 아니다. 우리가 가졌던 종래의 건축개념을 뒤집어 우리가 믿었던 신념들을 다시 반추하게 만든 까닭이며 동시에 우리 시대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제시한 이유이다.
그야말로 이 건축은 새로운 건축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평가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 건축이 거둔 빛나는 건축적 성취는 이 건축의 구조체 자체에 있지 않다.
이 건축은 땅의 서쪽 편 반을 경사진 광장으로 비웠다. 그리고 딱히 용도가 정해져 있지도 않다. 바로 공백의 공간( Void Space )을 고밀도의 도시 한 가운데 만든 것이다. 어떤 일이 이 곳에서 일어날 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아무도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경사진 광장에는 이 건축 내부에 걸릴 수 없는 작가들이 그림을 내거는 장소가 되었으며 내부 공연장을 사용하기에는 품위가 더없이 떨어지는 광대들이 마구 끼를 발산하는 장소가 되었고 파리의 시민들이 이방인들이 서로 격의 없이 어울리는 장소가 되었다. 경사진 안 쪽에 솟은 이 건축의 외벽은 이 장소를 위한 무대 뒷벽이 되었고 이 무대 뒷벽을 오르는 이들이 만드는 풍경은 전통에 찌든 파리의 도시 풍경에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삶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믿건대 야망에 찬 젊은 건축가 로저스와 피아노가 이 장소의 중요성에 대해 간과했다면 이토록 대담한 도시의 공백( Urban Void )을 만들 수 없었으리라. 이들이 만든 비워진 광장은 모든 응모안 중 유일한 제안이었다고 한다. 건축사가 라이너 밴함( Rainer Banham )은 이 건축을 두고 ‘ 70년대가 만든 유일한 대중적 기념비’ 라는 말로 이 건축이 보여준 시대적 상징성을 강조한다. 그가 말한 기념비가 건물에 있을까. 아니다. 이 건축이 만든 기념비는 경사져 누운 광장과 이를 지지하는 벽에 있다. 바로 이들이 만든 ‘장소’ 에 있다.
그렇게 믿는다.
이 건축이 현대건축에 남긴 중요한 화두는 하이 테크놀러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정신이라는 것이다. 하이 테크놀러지 자체는 건축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이며 그 하이 테크놀러지를 만든 정신이 건축인 동시에 ‘큰 기술’ 이다. 바로 오랜 건축 속에 사로 잡혀 있던 우리의 고루한 인습을 비난한 큰 기술이었다. 그 큰 기술은 ‘반 건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