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세계는 형태가 없다’-의성 김씨 대종가

주간조선

2003. 8. 27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다. 예컨대 오래 산 부부가 서로 닮아 있는 것도 한 공간에 같이 오랫동안 산 까닭에 몸과 마음이 비슷하여져서 얼굴마저 변한 것이라고 여긴다. 윈스턴 처칠도 이렇게 이야기 한적이 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 그렇다. 건축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확실하고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한 가족의 아이텐티티를 만드는 일-가풍의 형성은 그 가족이 사는 집의 공간구조가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좋은 공간의 집에서는 좋은 가족과 좋은 가풍이 만들어지게 마련이며 그 역의 경우도 성립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틀림없이 부동산이다. 아파트니 빌라니 맨션이니 하는 이름도 그러하고 로얄층이니 팰리스니 하는 것이 우리의 주택을 환금성 가치로만 인식한 결과이다. 이런 집에서 기품 있는 가풍과 주거문화가 이루어지기란 난망 한 일이다. 대개 서양의 집을 흉내 낸 이런 집들은 침실 거실 식당 화장실 같은 생리적이고 본능적 공간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도무지 묵상할 수 있는 지적 창조의 공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동물적 주거일 뿐이다.
이와 반대의 위치에 있는 집들이 바로 우리의 옛 선조들의 집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의 옛 집들은 방의 이름을 침실이나 거실처럼 목적을 가지고 부르지 않았으며 위치에 따라 안방이며 건넌방 문간방 심지어 변소도 뒤에 있다고 뒷간으로 칭했다. 이는 우리의 선조들에게는 방들은 거주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수시로 그 용도가 만들어지고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부자리를 깔면 침실이요 밥상을 놓으면 식당이며 술상을 차리면 사교장이 되는 변화무쌍한 공간이 바로 우리의 옛집이 가진 지혜인 것이었다. 뿐 만 아니다. 마당이며 대청 같은 외부인지 내부인지도 모르는 공간은 딱히 기능이 없었으나 옛 집의 근본이었으니, 그야 말로 요즘 현대건축의 중요한 개념인 불확정적 공간의 결정체가 아닐까. 이 중에서도 내 마음 속에 경외심으로 남아 있는 집이 바로 ‘의성 김씨 종가댁’이다.

안동시내에서 임하댐 방향으로 물길을 따라 가다 보면 오래된 소나무 숲이 나오는데 그 길의 왼편에 있는 동네가 물가 앞에 있다고 하여 내앞마을로 불린다. 의성 김씨 동족마을인 이곳은 15세기에 김만근이 임하현의 오씨에게 장가들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의성 김씨 대종가’는 김만근의 손자인 김진(1500-1580)을 불천위로 모시는 종가이며 벼슬하기 보다 학문하기를 좋아한 그는 아들 다섯을 모두 과거에 급제시킬 만큼 교육에 힘쓴 인물이다. 그 넷째 아들이 조선시대의 거유였던 학봉 김성일(1538-1593)이며 그는 처음의 대종가가 선조 때 불타 없어지자 이를 재건한다.
학봉 김성일은 누구인가. 그는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부사로 갔다가 정사였던 황윤길과 달리 일본의 침략의도가 없는 것으로 조정에 보고하여 상황판단을 잘못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일부러 그리했다고도 하며, 한편으로는 전쟁에 대비하는 일에 주력할 것을 주장하였고 실제 전란에서는 누구보다도 앞장 서 왜군에 대항해 싸우다가 진주성에서 전사하고 만다.
후대로 하여금 그를 더욱 추앙하게 하는 것은 그의 학문적 성취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서 성리학의 대학자였으며 사상가였고 대대로 그 인품과 풍모의 고매함을 존경 받으면서 임천서원에 배향된 조선의 대표적 선비였다. 그런 그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집이 이 ‘의성 김씨 대종가’의 건축인 것이다.

55칸 규모의 이 집을 사당 옆 뒷산에 올라 내려다 보면 그 공간 구조가 확연히 나타난다. 박공지붕으로 우뚝 솟은 안채를 중심에 두고 사랑채와 누서고, 행랑채 등이 몸 기(己)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방이 둘러 막혀 하늘로만 뚫어진 마당이 안채마당이며 장방형의 꼴이되 한 구석을 슬쩍 틔운 게 사랑마당이다. 시골에 있는 집들이 대체로 느슨한 구성을 가지는데 비해 이 집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잘 짜여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완벽한 구성을 가진 이 집이 보여주는 놀라운 기품은 바로 사랑마당의 공간감에서 극에 달한다.
큰 길에서 이 집으로 진입하는 길이 직선으로 벋어있어 들어오면서부터 적잖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지만, 중문을 열자 두 눈에 들어오는 사랑마당의 긴장감은 어느 방문객이든 순간적으로 침묵하게 한다. 보통은 사랑채가 집의 앞에 나와 있으나 여기서는 가장 뒤편에 물러서서 이 마당을 지배하고 있다. 서른 댓 평 남짓한 이 직사각형 마당은 사방이 거의 두 개층 높이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공간의 밀도가 대단히 압축적이다. 중문 안쪽 바로 옆, 안채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어 겨우 그 긴장을 이완시킨다.
이 마당을 지배하는 사랑채는 비록 작은 쪽문을 가진 극히 절제된 볼륨이지만, 행랑채와 이어지는 2층 서고 누다락과 만나는 풍모가 대단히 다이나믹한 까닭에 결코 품위를 잃지 않는다.
그렇다. 이 견고한 사랑채가 조선의 대 유학자가 그의 지적 창조를 위해 만든 공간이구나. 저 품격, 기상에 저절로 고개 숙이며 가만히 사랑에 올라 마당을 내려다 보면 삼라만상이 마당에 가득 담긴 듯 고요하고 잠재적이다.

안채는 폐쇄된 ㅁ자형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 안채가 특이한 것은 넓은 대청마루가 서너 단으로 레벨이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대종가인 까닭에 제사를 지낼 때 가족의 위계에 따라 앉는 자리가 정해진 것이라 하니 유교적 삶의 방법이 집의 디테일까지 바꾸고 말았다. 이 안채의 마당이 그리 넓지 않은데다 치며 나온 지붕이 하늘을 거의 가렸으니 몹시 빛에 대해 인색하다. 방만하기 쉬운 안채의 삶을 또한 절제시키기 위해 학봉은 빛 마저 거저 주기를 꺼려 했을까.

봉제사 접빈객(奉祭祀接賓客)을 하는 대종가인 까닭에 사랑채의 대청은 손님이 묵을 수 있는 부속공간이 딸려 있는데, 그 문 위에는 이렇게 써 있다. ‘대상무형(大象無形)’, 즉 큰 세계는 형태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 이 집에서 중요한 것은 집의 모양이나 크기나 재치가 아니다. 스스로를 절제하고 극기하려는 조선 선비의 큰 정신세계이다. 우리 시대의 주거문화에 거의 실종된 것처럼 보이는, 옛 선비의 신비로운 지적 창조의 세계 말이다.

그러하다 이 집은 선비가 사유(思惟)하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