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 없는 도시, 터무니 없는 사회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5. 12. 03

오래된 서양도시들, 예컨대 런던이나 파리, 비엔나나 프랑크푸르트의 원도심은 2천년전 로마의 군단 주둔지였다. 이 도시들의 중심지역인 시티지역, 시테섬, 그라벤, 뢰머광장 등이 카스트라라고 불렸던 로마군단 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이며, 군단주둔이 장기화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 캠프의 중심공간이었던 포로나 중심도로인 카르도, 데쿠마누스 같은 공간은 이름은 바뀌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장구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
캠프라는 시설은 필요에 따라 쉽게 설치하고 해체해야 하므로 평활한 땅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오늘날 대도시로 변모한 이 캠프가 설치되었던 평지라는 지형은 결국 서양인들의 도시에 대한 관념에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봇물처럼 쏟아진 이상도시 건설을 위한 각종 계획도를 보면 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 원형의 도상으로 된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계획도는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한 가지 개념을 공유한다. 즉, 주변의 환경을 적으로 간주해서 도시둘레에 해자를 파고 외곽을 높은 성벽으로 두른 다음, 내부는 방사형이나 격자형의 가로망으로 정밀하게 조직하여 한가운데에는 그 도시의 영주가 사는 궁전을 둔 형태, 그렇게 이루어진 단일중심의 계급적 봉건도시가 그네들이 건설하기를 열망한 유토피아였다. 물론 이들 모두는 평면으로 된 기하학적 도형이라 이를 실현하는 일은 지형이 복잡한 산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계획도시는 군사방어를 목적하는 도시 외에는 모두 평지에 세워진다. 이런 기하 도형은 인간의 이성에서 먼저 창안되는 형상이어서 르네상스 인들은 땅을 보기 전에 먼저 도시의 형상에 대한 구상을 마쳤다는 것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땅은 백지 같은 지형이어야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평지도시의 건설은 변하지 않는 전통이었다. 20세기의 시대정신으로 나타난 모더니즘의 건축가들은 도시를 노동과 교통, 주거와 휴식이라는 큰 분류로 나누고, 전체 땅을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의 용도로 평면 분할하는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도를 그렸다. 산업과 경제가 정치와 종교를 대체하는 권력으로 떠 오른 이 계획은 20세기 모든 신도시들의 교본이 된다. 기능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였으니 빠른 동선, 빈틈없는 공간활용이 계획기준이었고 평지를 신도시의 대상지로 선택하는 일은 당연한 우선 순위였다. 도시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수 없이 많은 신도시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도시들이 만들어진 후 환경파괴, 도시오염, 빈부격차, 도시범죄 등이 폭증하자 많은 도시사회학자들이 앞다투며 이 계급적이고 계량적 신도시들을 비판했다. 미국 센트루이스 시에 미래세계의 완벽한 주거환경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건립되었던 프루이트 아이고라는 주거단지가 지어진 지 17년만인 1972년, 도시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쓰고 다이너마이트로 전체가 폭파되고서야 마스터플랜으로 신도시 만드는 일은 서양에서는 폐기되었고 모더니즘도 종말을 고하고 만다.
그럼에도 땅과 무관한 도시 만들기의 꿈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20세기 말에까지 서양인들이 제시한 미래도시는 때로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나며, 가끔은 황폐한 땅 위에 거대구조의 인공환경으로 만든 도시에서 살기를 제안한다. 아키그램이라는 집단이 제안한 도시를 보면 인간의 삶은 거대한 기계나 공장처럼 땅의 조건과는 관련 없는 완벽한 인공구조물 속에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런 류의 도시들은 도면으로만 남고 실현되지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실현된 곳이 있으니, 내 생각으로는 두바이다. 두바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앞다투며 벤치마킹 했던 도시였다.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을 만들고 구름 문양의 환상적 도시구조를 가진 두바이의 땅은 본래 사막이다. 바람 불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 불모의 땅에서는 어떤 그림을 그린들 아무 상관이 없다. 언젠가 도시의 수명을 마치면 다시 그런 사막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런 곳은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시라. 그 지도 속 우리의 땅은 산과 계곡이 분명하며 물길과 양지바른 터들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곳이다. 이 터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터무니이니 이 단어는 우리의 존재와 이유가 모두 터에 있다고 믿은 우리 선조들의 관념어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서양화가 근대화인 줄 착각하며 서양식 도시를 흉내 내고자 서양에서 폐기된 마스터플랜을 가져와 우리 땅에 앉혔다. 국토의 70펴센트가 산지인 우리 땅에 평지는 귀한 경작지이므로 산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신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은 매워야 하며 물길은 돌려야 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량을 일으키며 신기루 같은 신도시가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모두가 터에 새겨진 무늬를 깡그리 지운 결과여서 이른 바 터무니 없는 도시였다. 특히 아파트가 그러했다. 지형을 바꾸면서 지은 집들이니 터무니 없는 집이며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그래서 터무니 없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게 말장난일 뿐일까?
모든 땅은 고유하다. 적어도 위도와 경도가 다르다. 땅마다 자연이 새긴 무늬가 다르고 그 위에 우리 삶이 영위되면서 새긴 무늬도 달라 모든 땅은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땅은 그 스스로 어떤 건축이 되고 싶어하고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내가 믿기로는 모름지기 좋은 건축가, 좋은 도시계획가는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며, 좋은 건축이란 그 터가 가진 무늬에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지난 시절의 무늬와 함께 그 결이 더욱 깊어 가는 건축일 게다. 그게 터무니 있는 건축이며 그러함으로 터무니 있는 삶이 생겨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왜 이토록 터무니 없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질까?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그 도시가 또한 사회를 만든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잘못은 지난 시대 잘못 만든 터무니 없는 도시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