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시도와 책거리

중앙일보 '중앙시평'

2017. 11. 25

올해 초 90세로 별세한 작가이자 비평가인 존 버거는 1972년에 펴낸 『보는 방법(Ways of Seeing)』이라는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습적 태도를 적시하고 다른 시각이 갖는 세계를 논쟁적으로 소개한다. 포켓북이지만 건축이나 미술학도 사이에서 지금도 중요한 텍스트인 이 책이 내 관심을 특히 끄는 부분은 투시도에 대한 비판적 서술이다. 그림은 그리는 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일 게다. 우리가 투시도에 익숙하다면 그 그림방식에 동의한다는 것이며 어쩌면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인지 투시도법을 공간과 사물을 보는 정통적 방법이라며 학교의 교과목으로 배우기까지 했다.

투시도는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 대성당의 돔 지붕을 지은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창안한 그림방식이다. 바라보는 공간의 정중앙에 보는 이가 위치하고 그의 눈으로 모든 공간의 선들이 소실되어 형성되는 그림인데 하나의 렌즈로 포착되는 영상과 같다. 그런데 풍경이나 공간은 수없이 많은 다른 앵글이 있지만 투시도는 단 한 사람의 눈으로만 포착된 광경이라는 것, 즉 다른 이들과 공유하지 않는 독점적 세계가 투시도라고 존 버거는 지적한 것이다.

독점과 중심. 이 관념은 서양에서 건축과 도시를 형성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한다. 1566년 안드레아 팔라디오가 설계한 빌라로툰다라는 집은 정방형 평면 가운데 원형공간을 두어 이곳을 점거하는 이가 세상의 중심이며 주변의 지배자라는 개념의 실현이었다. 서양건축사에 획을 그은 이 건축은 수많은 아류를 낳으며 오늘날까지 서양건축의 지독한 뿌리가 된다. 단일중심의 계급적 공간구조는 비단 집에 국한된 게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절 유럽 곳곳에 건설된 신도시들이 영주의 저택을 가운데 두고 주변을 계급별로 조직한 후 적대적 성벽을 두르고 유토피아라 칭하며 나타났다. 이 봉건도시의 계급적 개념은 현대의 도시계획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니, 땅을 상업·주거·공업지역 같은 용도로 나누는 것이나 도로들을 등급으로 구분하여 각종 제한을 두는 게 같은 관념이며, 도심·부도심·변두리 같은 위계적 도시구조가 또한 그 영향이다. 모두가 다 투시도법에 입각한 세계관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투시도 외에 어떻게 그리는 방법이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우리 선조 중의 한 분이 책거리라는 그림을 통해 전혀 다른 시각을 보였다. 책거리는 책장을 그린 조선의 민화다. 그중에 여덟 칸의 책장을 그린 한 그림을 보면, 여덟 칸 모두가 한 점으로 소실되는 게 아니라 각각의 중심을 향해 소실된다. 이뿐만 아니라 각 칸에 놓인 서책이나 도구들은 그 칸의 중심이 아니라 모두 자기 중심들을 향하고 있어 얼핏 중구난방이지만 전체로서 그림은 균형과 품위를 아름답게 유지한다. 이 책거리 작가가 믿는 바로는 세계는 하나의 중심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사물과 공간에 나름의 중심이 있다는 것이니 필시 그는 봉건사회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를 꿈꾸는 것 아닐까, 오래전 존 버거의 책을 읽은 직후였던 나는 이 그림을 보며 놀라움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모두가 중심이고 주인인 세계. 중앙광장이나 중앙로 같은 봉건의 잔재가 남은 도시환경에 우리가 익숙해져서 그렇지 세상에는 모두에게 평등한 공간체계를 가진 도시가 아직도 많다. 주로 서양식 도시구조의 영향이 덜 미친 곳들인데, 이슬람의 도시들이 대부분 그러하고 가까이는 우리의 오래된 마을 또는 달동네의 공간구조들이 죄다 그런 구조를 갖는다. 대체로 이런 동네에는 전체를 지배하는 랜드마크 같은 건물이 없으며 고만고만한 서로 다른 것들이 뒤범벅돼 모여 있다.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의 모습, 즉 다원적 민주주의의 도시풍경이라고 설명하며 여기서는 서로의 차별성이 오히려 발전의 주체라고 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이들이 같이 모여 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민주시대를 사는 우리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세상만사를 늘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나로서 의당 가지게 되는 의문. 지금 우리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몸서리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혹시 그 모든 적폐의 근본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만 옳은 투시도법을 배워 만든 도시환경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도시가 사회를 만든다고도 했는데, 나쁜 도시조직은 그냥 두고 이 시린 기간만 지나면 바른 사회가 될까? 존 버거의 생각이 몹시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