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세운 공동체-‘신들의 도시’ 테오티후아칸

중앙일보 사회

2004. 1. 03

인간은 종교적 동물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정의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도처에서 수 없이 영향 받는 종교적 환경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요즘 일어나는 세계적 분쟁도 이념보다는 종교 간의 반목 때문처럼 보인다. 많은 이들이 부인하지만, 이라크전쟁도 그런 갈등의 냄새가 짙다. 권력보다도 더한 종교의 힘, 그런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아마도 ‘피의 대가’ 아닐까.
신앙인으로서 가장 성스러운 행위는 순교(殉敎)일 게다. 그래서 절대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에게 성인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순교는 그가 가진 믿음에 대한 박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고대종교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통례적 의식이었다. 성서의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가 백 살에 낳아 애지중지 하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그 당시 종교적 의식으로 거행되던 관례였을 것이다.
원시종교라는 것이 대개 자연현상의 신비에 대한 경외로 인해 발생한 것이고 안녕과 풍요에 대한 기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비록 그 숭배하는 대상이 지역과 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목숨이었고 순결한 처녀나 흠 없는 어린 아이들의 몸이라면 가장 귀한 제물이었을 것이다. 소위 이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습속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명대신 살찐 양이나 잘 익은 곡식 등으로 대체되었지만, 중세에 이르도록 여전히 사람을 제물로 삼는 이들이 있었으니 중앙아메리카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 내었던 잉카와 마야, 아즈텍 인들이 그들이다.
멕시코 중원을 다스리던 아즈텍의 지배자들이 성지로 삼아 순례하는 곳이 있었다. 테오티후아칸(Teotihuacán)이라는 곳. ‘신들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지금,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를 떨어져 광활한 멕시코 고원 속에 있는 폐허이다.
이 테오티후아칸은 문자도 남겨진 것이 없고 언어도 알 수 없어 그 도시를 건설한 이들이 누구였는지 또 왜 이 도시가 멸망한 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폐허의 도시에 그들이 남긴 놀라운 삶의 흔적은 그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증언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AD 1세기부터 이 도시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7세기 경 멸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멸망되기 전 이미 125,000 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고 하니 그 당시 다른 나라의 도시인구와 견주면 세계에서 여섯 번 째로 큰 도시였다.
놀라운 것은 이 도시가 가진 정교하고 치밀한 구조이다. 건설 초기부터 이 도시의 완성에 대한 완벽한 구상이 있었음이 틀림 없으며 그 계획은 수 백 년에 걸치면서도 빈틈 없이 실행되어 육백 년의 세월을 버틴 것이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이 도시의 중앙부에는 전체 도시를 관통하는 직선의 공간이 있는데 이름하여 ‘사자의 길(the causeway of the dead)’이다. 40m에서 100m에 이르는 폭과 무려 2.5km가 넘는 길이의 이 엄청난 길. 더구나 남쪽으로 3km의 길이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니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거대 공간을 만들었던가.
이 길의 양 쪽 끝에는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수도 없이 전개되어 있는데, 북쪽 끝에는 ‘달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의 석조 구조물이 그 정점이다. 이 피라미드는 밑 바닥 평면의 크기가 200m를 훨씬 넘고 높이는 63m에 이른다. 그 앞에 넓은 광장 주변에 15개의 피라미드가 집중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하는‘죽은 자의 길’은 남쪽으로 강렬하게 달린다. 왼 편에 불끈 솟은 ‘태양의 피라미드’를 지나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조 구조물과 크고 작은 광장과 사원과 피라미드와 집들의 폐허들을 지나면 상 후안(San Juan) 강을 만난다. 이 도시의 중요한 물줄기인 이 강을 건너면 왼편에 ‘지식과 문명의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퀘차코아틀(Quetzalcoatl)이 또 다시 주변을 압도하며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폐허에 남은 불과 몇 건축물의 잔해를 들어가 보면 이들이 누렸던 문화의 크기와 깊이가 소위 끝도 없고 한도 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조물의 구축방법뿐 아니라 공간의 구조, 도처에 부지기수로 만개한 조각의 솜씨, 화려한 벽화…… 보이는 게 이 정도이니 정작 그들 문화의 실제는 얼마나 화려하였을 것인가. 뿐 만 아니다. 그 거대한 길의 바닥을 관통하며 구축한 배수 통로와 하부구조물 등, 그야말로 완벽한 도시와 완벽한 삶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도시는 이 찬란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가치에 의해 존속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자의 길’이었다.
나는 건축이 사람을 바꾼다고 주장하여 왔다. 도시도 마찬가지이다. 도시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도시가 만들어진 이념대로 그 사회가 이루어진다. 전제적 도시에서는 전제적 사회가 만들어지고 민주적 구조를 가진 도시에서는 민주사회가, 문화적 도시에서는 문화의 사회가 만들어 질 것이다.
테오티후아칸의 도시는 강력한 제정일체의 도시였다. 강렬한 축선 위에 놓인 ‘사자의 길’은 도시의 공간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가치 자체였다. 그 가치는 직선으로 뻗은 경직된 가치이며 모든 구성원은 그 가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다. 단일 가치를 가지는 도시, 그러한 도시는 광기의 도시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섬긴 신들 중에 시페토텍이라는 신에게는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친다.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그들의 부족이 참석한 가운데 길 양편에 쌓여진 제단 위에는 횃불들이 오른다. 요란한 북소리가 긴장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화려한 장식을 한 신관이 출현하고, 그 길을 따라 제물로 선택된 젊은 여자가 죽음에의 길을 떠난다. 결국 신관은 그 여자의 심장을 꺼내어 신에게 바치고, 여자의 살갗을 벗겨 스스로 의복처럼 걸치며 제단을 맴돌면서 그들의 의식은 엑소터시에 다다른다.
나는 지난 1995년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하였다. 그 때, 불같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던 날 일행들과 함께 이사자의 길에 들어 선 순간 진공의 상태를 경험하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처절히 보이는 이 ‘사자의 길’을 걸으며 나는, 외경스러운 나머지 그 더운 기후에도 몸 떨림을 느꼈던 것이다.”
이 도시의 문화는 그 후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 영향을 주면서 아즈텍과 마야 그리고 잉카의 문명을 꽃 피우게 하였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을 제물로 보내면서까지 그 피의 대가로 누리던 그들의 평화는 다른 종교에 의해 처참하게 부수어지고 만다.
16세기 초, 멕시코 고원 속의 찬란한 문명국 아즈텍은 코르테즈가 이끄는 스페인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되고 유린되고 말았다. 아즈텍 인들이 가졌던 신앙은 기독교도들에게는 야만이었고 사탄의 작용이었을 뿐이며 공유할 수 없는 가치였던 까닭이다. 사실은 아즈텍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황금의 탈취가 더 큰 이유였으나, 명분은 인류의 구원이었고 이교도의 교화였다. 결국 그들이 믿는 다른 종교의 도시를 세우기 위해 다시 엄청난 피를 요구한 것이다.
피의 대가로 세운 도시의 결말이었으니 그것은 또 다른 광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