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상주의자의 기념비_쥬세페 테라니(Giuseppe Terragni)와 코모 파시스트의 집 (Casa del Fascio, Como)

대우건설 사보

1999. 3. 16

전에도 기술한 바 있지만, 나는 건축이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이들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건축을 그리고 만드는 일을 한 순간의 유희로서 혹은 하나의 비즈니스로서만 여기는 것은 어쩌면 죄악에 가까운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들 삶의 존엄성 때문에 그러하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강박 관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박관념이 나를 끊임 없이 건축에 대해 사유케 하고 지적 훈련을 하도록 만든다.
내가 알기로는 건축사에 빛나는 수 많은 건축가들 모두 이러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러한 소명을 느끼는 그들은 때때로 혁명가였으며 수시로 구도자적 삶을 살았고 기본적으로 이상주의자들 이었다. 또한 건축사 속에 기록되지 않은 수 많은 무명의 건축가들도 그들이 정통적 건축의 길을 걸었으면 그들의 이상이 조금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부류였을 것이다. 당연히도 우리의 현재의 삶은 그들이 쌓아 올린 이상들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태리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스위스와의 접경지역에 코모( Como )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주변은 티치노( Ticino )라는 지역으로 연계되어 있는데 이 지역의 풍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워 여행자들을 그냥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 스위스로 넘어 가기 직전에 있는 이 코모 역시, 그 풍경의 아름다움은 다른 도시와 비견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이 도시는 알프스산맥의 맑은 물이 흘러 들어온 호수를 끼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
이런 곳에 세워진 건축은 비록 평범한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며, 역사적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이태리의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코모의 건축 역시 자연과 역사가 한데 녹아 있다. 이 평화로운 도시의 가로를 산책하는 것은 여간 즐거움이 아니다. 유쾌한 기분으로 시작한 여행자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코모 대성당에 다다름으로써 이 도시 산책의 대미를 장식하려 한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 모두를 갑자기 긴장시키는 사건이 생긴다.

도무지, 누적된 역사의 수 많은 켜들을 가진 이 도시에 있을 수 없는 건축이 코모 대성당의 뒤 편에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그것도 참으로 정연하며 기품 있게 생긴 현대 건축이 이 바로크의 성당을 마주보며 대립하듯 세워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현대건축’이 요즘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근 70년이 흐른 지난 1932년에 세워지기 시작하여 1936년에 완공되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가 어떤 때 인가. 가까스로 모더니즘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전통과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이며, 더욱이 새로운 이념의 투쟁으로 사회가 혼미할 때이고, 경제적으로는 세계 경제공황의 어려움을 아직 떨치지 못한 때이며,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이 심각한 대립을 가져오는 때이다.
이러한 때 지금에 봐도 현대의 건축을 세운다는 것은 여간한 신념을 가진 자 아니었으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이를 세운 이가 누구인가.

쥬세페 테라니( Giuseppe Terragni ) 라는 건축가였다.
한 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28세 때 이 놀라운 집을 설계했다는 것이다.
그는 1904년 밀라노 근교 메다에서, 건설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 난다. 그는 유년시절 어머니의 고향인 코모로 이주하여 학교를 다녔으며 이어 코모 공과대학의 물리 수학부에서 수학한 후 다시 밀라노 공대 건축과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한다.
그는 졸업하면서 다른 6명의 건축 동지들과 함께 ‘ Gruppo 7 ‘ 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는데 역사가들은 이 그룹의 결성이 이태리 합리주의의 첫 결성이었다고 기술할 정도로 이태리 근대건축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젊은 이들이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졸업 후 전시회를 개최하거나 여러 곳에 기고한 글을 통하여 그의 건축적 신념을 광범하고도 적극적으로 발표한다. 이 영향으로 많은 일들이 그에게 주어지게 되며, 드디어 1932년 코모의 파시스트당 연방서기국으로부터 이 신념의 건축을 설계할 것을 주문 받게 된다.
그가 교육 받은 밀라노공대 건축과의 수업은 다분히 역사적 건축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는 20년대부터 그의 나라에 불기 시작한 파시즘에 영향을 받으면서 역사적 질곡에 대해 저항할 실마리를 갖는다. 그는 이 파시즘을 통하여 그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는 빛나는 지중해 문화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자란 배경인 코모의 지역성으로부터의 강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얌전한 성격을 가진 그였지만, 그가 가진 이중성은 건축가 테라니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는 건축적으로는 추상계열에 속하면서도 즐겨 하는 그림은 구상적인 것이었으며, 골수 파시스트이면서도 독실한 카토릭교도였다. 상당한 지적훈련을 쌓은 그였지만, 말 많은 자를 경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모더니스트임에 틀림없지만 그의 속내에는 고전건축이 깔려 있었다. 본질적으로 극단적 도덕주의자인 그는 기념비적 건축가와 타협하는 것을 거부했으나, 그가 경멸한 코모 파시스트당 책임자와는 같이 일하는 모순적이고 이중적 태도를 곧잘 보이기도 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믿은 신념은, 보편성을 기초로 하는 카토릭과 특수적 우월성을 우선으로 하는 파시스트를 화해시키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반대되는 입장의 화해는 극심한 내부모순을 가지고 있는 일 이었건만 그는 이 통합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의 신념의 결정이 되는 건축을 통해 이를 실현해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코모 파시스트당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건축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건축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건축적으로 신념에 차있는 이 28세의 젊은 건축가를 주목하게 된다. 특히 그가 골수 파시스트라는 것은 그를 이 건축의 설계를 위한 적임자로 지목하는데 가장 긍정적인 면이었으나, 그의 나이가 약관이라는 것을 염려하여 엄중한 주문을 한다. ‘ 새롭고 기품 있는 모던한 건축, 그러나 실험적이지 않을 것’-그가 받은 주문의 골자였다.
그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꿈꾸는 이 파시스트 당사를 위해 엄정한 기하학적 질서를 갖는 백색의 상자를 그려서 보였다. 33.2m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사각형의 평면과 그 치수의 정확한 반이 되는 16.6m를 높이로 하는 입면의 대리석 덩이였다. 평면은 기본적으로 유럽 건축의 전형을 이루어 온 나인스퀘어-사각형을 9개의 면으로 나누어 가운데 부분을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두는 형식-로 되어 있다. 비록 견고한 대리석 덩이이지만, 그 속에는 2층 높이의 천창을 통하여 현란하게 빛이 들어오는 아트리움이 있고 그 주변에 투명한 유리로 구획된 실들이 있어 이 속은 완벽한 다른 세계가 된다. 그가 믿은 파시즘의 투명성을 이 집을 통해 설명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 이 집은 ‘ 파시즘의 유리집 ‘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내부기능이 달라 다른 표정을 갖기 쉬운 입면은 엄정한 비례질서로 인해 통합되어 있다. 특히 이 통합된 입면과 다른 켜를 갖는 내부가 더욱 풍부한 입면의 깊이를 연출하는 것은 현대 건축의 교본이 된다. 통합된 입면이라고는 하나 실제로 4면의 입면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각기 다른 도시의 풍경을 마주한다. 특히 코모 대성당을 마주하는 정면은 비록 비대칭의 입면이지만 강한 정면성을 가지고 있으며 역사건축의 무거운 부담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새로운 이념, 새로운 역사의 도래를 침묵으로 가리킨다. 그 사이에 놓인 임페로광장은 팽팽한 긴장 속에 있다.
이 긴장은 카토릭과 파시스트의 대립 때문인가, 아니면 그가 꿈꾼 두 원칙의 화해인가.

이 집이 세워진 후 열화와 같은 반응들이 있었다. 어떤 것들은 찬사였지만 많은 부분들이 비난이었다. 심지어는 우리의 건축가 테라니의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철저한 개인주의적 산물이라고 혹평하는 평론도 있었다. 이에 이 건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시스트당의 한 간부는 몇 가지 장식을 달 것을 주문하고 테라니가 이에 응하지 않자 다른 사람에게 그 변경을 의뢰하여 구체적 대안까지 만들기도 하였다. 파시즘의 본질적 이상을 누구보다도 더욱 잘 이해한다고 믿는 테라니에게는, 더구나 이 건축이 그 이상의 실현임을 굳게 믿었던 그에게, 이 무례한 파시스트의 언사와 다른 건축가와 예술가들의 견강부회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건축에 대한 평가는 곧 이은 전쟁과 새로운 사조의 출현으로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새로운 단편적, 단말마적 건축사조가 유행처럼 번지던 70년대에 들어와 이 건축은 건축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참된 지식인들에 의하여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역사학자 파올로 포사티( Paolo Fossati )는 절대적 형태의 결정체인 이 건축이야말로 정치와 시민생활에 관한 리얼리티의 명백한 표현이며 절대 가치를 갖는 개인주의의 승리하고 평한다. 유명한 건축사가 레이너 번함( Reyner Banham )의 평가는 더욱 극적이다.
” 이 ‘카사 델 파쇼’는 30년대에 이루어진 가장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이다….대성당과 극장을 둘러 싼 광장을 가로 질러 보이는 이 건축의 정면은 절경이다. 그것은 신성한 비례규율에 의해 대리석 위에 각인된 불멸의 기호인 것이다. ”
아 그렇다. 테라니가 세운 이 건축은 고전주의에 대한 투쟁을 격려하는 근대 건축양식의 범전이었고 합리적 정신으로 무장한 그의 이상이 빚어낸 기념비였던 것이다.

이 이상주의자 테라니는 이태리가 2차대전에 개입하여 독일 나치와 연맹하자 러시아전선이 형성된 발칸반도의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그는 전쟁 중에도 건축을 그리는 일을 그만 두지 않았다. 오히려 주옥 같은 계획안들이 줄줄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신경쇠약이라는 진단으로 전쟁 중이던 1943년 집으로 후송된다. 왜 신경쇠약이라는 정신질환을 앓아야 했을까. 혹시 그의 이상이었던 파시즘이 인간을 황폐화 시킨다는 것을 알아서 일까.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최상의 가치여야 하는 건축과 대립된다는 것을 혹시 깨닫게 된 것은 아닐까.
병 중이던 그는 결국, 그가 사랑하던 여인 마리아 카스텔리( Maria Castelli )의 집 계단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불멸의 건축을 세웠다고는 하나, 아 불과 39의 나이였다. 그리고 그 날은 이태리 파시즘 종말의 6일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