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내 사랑”

경향신문 '오피니언'

2014. 1. 23

‘히로시마 내 사랑’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1959년도에 알랭 르네라는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한 프랑스 여인이 히로시마에 영화 촬영으로 방문했다가 일본인 건축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여인은, 전쟁 중에 느베르라는 마을에서 한 독일군 병사와 나눈 사랑을 비극적으로 끝내야 했던 상처가 있는데, 그 까닭으로 원폭의 참상이 뒤 덮은 히로시마에서 새로운 사랑에 빠질수록 그 비극을 연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극중 인물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가운데, 여인은 남자에게 ‘당신은 히로시마’라고 부르고 남자는 여자에게 ‘당신은 느베르’라고 대답한다. 당신은 히로시마? 무슨 말인가.

건축 없이 우리가 사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건축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요즘은 그래도 신문의 문화면에 건축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인식에 건축은 여전히 부동산이다. 모 경제지에서 대한민국건축문화대상이란 거창한 이름의 건축상을 주관하는 것도 그 연유일 게다. 건축을 바라보는 시각은 대개 두 종류인데, 하나는 공학이나 기술로서의 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예술로서의 건축이다. 좀더 식견이 있는 척하면 기술과 예술의 접합점에 있다고도 한다. 대학에서도 건축과는 공과대학이나 미술대학에 속하는 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었으니 학문적으로도 건축의 상위 분류는 기술과 예술이다. 그럴까?
옳지 않다. 그런 분류는 건축을 시각적 대상으로만 본 결과다. 즉, 어떻게 이런 큰 건물을 지울 수 있을까라는 기술적 관심과 외부 모양에 대한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시각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건축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예컨대 요란한 형태와 색채로 외부를 장식하여 그 내부가 어떤지를 도무지 알 수 없게 한 건축은 유명한 건축이 될지는 몰라도 좋은 건축이 되기는 오히려 어렵다. 건축은 기본적으로 우리 삶을 영위하는 내부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며 따라서 그 공간이 보다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간은 불행하게도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니어서 설명하기가 무척 어렵다. 우리가 어떤 건축에서 감동을 가진다면 그것은 거의 다 그 건축 속에 빛이 내려앉아 빚어진 공간의 특별함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간은 보이지 않은 까닭에, 남에게 그 감동적 건축을 설명할 때면 대개 천정의 모양이나 벽과 바닥의 장식 등을 이야기할 뿐이어서, 이를 듣는 순간 공간은 사라지고 건축은 잘못 설명되고 만다. 그래서 건축은 어렵다고도 한다.
이 보이지 않은 공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실은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바로 그 건축 속에서 사는 방법과 분위기, 사건과 역사를 설명하면 된다. 건축설계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조직시켜 주는 일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건축설계를 하는 이들이 해야 하는 우선의 공부는 그 건축 속에서 살게 되는 이들의 삶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특히 남의 집을 짓는 일이 고유직능인 건축가라면 기본적으로 문학이나 영화, 여행을 통해 그들의 삶을 알아야 하고, 어떻게 산 지를 알기 위해 역사적이어야 하며, 왜 사는 지를 알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한다. 그래서 건축을 굳이 어떤 장르에 집어넣으려 하면 인문학에 가깝다. 물론 기술이나 공학적 요소도 있어야 하고 예술적 성취도 이루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일 뿐 건축을 포괄하지 못한다. 인류가 시작되어 집이 먼저 생겼지 기술이나 예술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님을 상기하시라. 하이데커는 ‘우리는 건축으로 거주함으로써 존재한다”라고 했다. 건축이 우리의 존재자체라는 말일진대, 건축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도시는 무엇일까. 도시는 익명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이다. 농촌은 기본적으로 혈연으로 구성되어 인륜이나 천륜만으로도 그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게 위해 모여 만들어지는 도시 공동체는 합의된 규약에 의해 유지된다. 광장이나 도로, 공원 같은 도시의 공공영역이 바로 그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들이다. 이 공공영역이 잘 조직되고 연결된 도시가 공공성이 발달된 선진도시이며, 파편적이어서 불연속적으로 이뤄진 도시는 미개도시이다.
민주주의의 도시에서는 그 공공영역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자유롭도록 만들어져 있고, 중심적 체제를 갖는 전제 도시에서는 권력의 안전과 권위를 위해 공공영역이 조직되며, 산업도시에서는 효율과 기능이 사람보다 우선되도록 구성되어 진다. 그러나 사회 체제는 시대의 요구에 따라 늘 바뀌는 것이며 가치도 변하기 마련이어서, 이를 담아야 하는 도시도 생물체처럼 바뀌며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던 도시는 역사 속에서 늘 멸망되었다. 그래서 건축에서 공간이 본질인 것처럼, 도시에서도 보다 중요한 것은 몇 낱 기념비적 건물이 결코 아니라 그 건물들로 둘러싸인 공공영역이다. 이 또한 보이는 물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도시는 그 애환과 열정을 담아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하면서 존속하게 된다.

‘사회정의와 도시’를 쓴 미국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1935-)는 민주주의의 시대의 새로운 도시와 건축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제시했다. “이미지에 대항하는 서사, 미학에 대항하는 윤리, 존재보다는 생성을 추구하는 기획”.
이는, 단일 건축이나 기념비가 갖는 상징적 가치보다는 그 주변에 담겨서 면면히 내려오는 일상의 이야기가 더욱 가치 있고, 시설물이나 건축물의 외형에 대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속에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사는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며, 도시와 건축은 완성된 결과물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담아 끊임없이 진화하고 지속되는 게 더욱 의미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도시는 기억으로 남아 통합된다는 것이다.
‘당신은 히로시마’. 폐허가 된 히로시마를 몸과 정신에 기록하여 기억하는 ‘당신’은 바로 히로시마 자체요 또 다른 당신은 느베르였으니, 우리 모두가 하나의 도시라는 말이었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이라는 제하의 이 칼럼은 그 바탕을 여기에 둔다. 이 귀한 지면을 한 동안 둔필로 소비하는 게 민망하지만, 함께 이 시대 우리의 도시와 건축을 조금이라도 성찰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