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eyard of Roh Moo-hyun

2010. 6. 30

– 노무현대통령묘역, ‘小石園

2009년 5월23일 토요일 아침의 첫 뉴스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을 전해주고 있었다. 노무현대통령의 투신자살. 가히 전대미문이었으며 경천동지의 사건이었다. 모두가 망연자실했다. 이 엄청난 사건에 이르게 된 정치적 배경과 그 과정이 어떠했든 간에, 이 땅을 사는 모든 이들은 노무현과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유홍준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묘역에 대해 의논해야 한다는 것인데, 노대통령 유언의 한 구절인 ‘작은 비석’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곤 장례식 전날 저녁, 내 사무실에서 첫 번째 위원회가 열렸다. 유홍준, 황지우, 안병욱, 정기용, 임옥상, 안규철 등 당대의 인물들이 모였다. (문재인실장은 지방에 있어 참석을 못했으며, 정영선선생이 나중에 가세 하였다.) ■ 노무현대통령의 집을 이미 설계한 정기용 선생은 묘역마저 직접 설계하는 일을 꺼렸다.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퇴임한 한 대통령의 남은 삶이 그가 자란 고향의 산하를 배경으로 풍요롭게 펼쳐지는 아름다운 거주풍경을 상상하고 그렸던 건축가로서, 이 뜻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두려운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내가 묘역의 설계를 맡아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 내가 아는 한, 노무현은 우리 사회에 생소한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기성 사회에 진입한 것도 보편적 방법이 아니었으며, 그가 획득한 포지션으로 사회의 여느 기득권자처럼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곧 마다하였고, 그는 늘 경계 밖으로 자신을 내몰았다. 그리고 경계 안의 사람들을 향해 질타했다. ■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권력과 지성인」이란 책에서, 지식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 “지식인이란, 지역성, 주관성, 현재의 시점이라는 각각의 것들과, 보편성이라는 것 간의 상호작용에 반응하며……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그리고 계급, 인종, 성적인 특권의식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 또 “지식인인 한,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여, 관습적인 논리에 반응하지 않고, 모험적 용기의 대담성에, 변화를 재현하는 것에 가만히 서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반응하는 자여야 한다.”고 했다. 노무현의 단호한 삶이 그럴 것이다. ■ 그 무렵, 「오늘」이라는 기독교 잡지로부터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에 대하여 글을 써달라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서슴지 않고,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인용하며, 노무현은 자발적 추방인이며 그래서 시대의 지식인이라고 썼다. 사실은 내가 믿는 기독교의 예수가 그러하였다. 예수는 내가 아는 한 철저한 자발적 추방인이었다. 유대교에 반기를 들었으며 로마황제의 권위에 의문하였고 그 사회의 모든 관습과 타성을 질타하였다. 가진 자의 위선을 통박하고 소외된 자를 가슴으로 안았다. 그리고 스스로 광야에 나가 고독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칭송할 때, 스스로 십자가에 매달려 불멸의 고독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희생으로 인하여 새로운 윤리와 도덕이 생기고 새로운 계율과 전통이 싹텄으고 세계를 지탱하는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지 않았는가. ■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는 자, 노무현대통령은 길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거의 항상 자발적 추방인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세계 밖으로 스스로를 영원히 추방하고 말았다. 노무현이었다. ■ 7일 째 되는 날 다시 토요일, 화장으로 거행된 대통령의 장례는 대한민국의 온 산하를 처절하게 하였다. 내 가슴속을 파고든 가장 애잔한 풍경은, 노란색 리본 위에 쓰인, 수 없이 많은 국민들의 애절한 글귀였다. 그리움이었을까? 슬픔? 분노? 아니다. 그 글귀들은 각성이었다. 살아 생전에 깨닫지 못했던 그 존재의 가치에 대한 경의였고, 그것을 잃게 된, 혹은 잃게 한 한탄과 비통함이었다. 그랬다. 모두에게 노무현의 죽음은 시대의 성찰이 된 것이다. ■ 장례를 마친 다음 토요일 6월6일, 나는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봉하마을로 떠났다. 봉하마을의 풍경은 참 아름다웠다. 140미터 남짓한 높이의 봉화산이지만, 오랫동안 백두대간을 달려 내려와 앉은 어엿한 풍모가 남아 있었으며, 더구나 주변은 낙동강유역의 평탄습지여서 그 가운데 솟아난 기세가 자못 위엄 있었다. 그 앞의 뱀산은 유장하게 벋어 화포천 속에서 꿈틀대는 모습이 압권이다. 그리고 콜라주 된 넓은 논밭의 수평면이 햇살에 반짝이며 그 반사된 빛을 이곳 저곳에 흩뿌리고 있었다. 작은 크기의 땅에서도 이토록 변화무쌍한 풍경을 연이어 연출하는 것은 우리 땅의 특성이지만, 이곳은 그 모든 한국의 풍경적 요소를 다 가지고 있었다. 가히 길지였다. 대통령이 나올 만 하다고 속으로 뇌였다. ■ 그리고 저 속에 부엉이 바위가 솟아 있었고, 그 풍세 또한 압도적 힘이 있었다. ■ 유족들은 이미 잠정적으로 사저의 뒷산에 묘역을 정한 터였다. ‘작은 비석 위원회’는 내려 오기 전부터 그 위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대통령은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세워달라고 했지만,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 모르되, 작은 비석이건 무덤이건 이 땅에 놓이는 한, 이미 엄청난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장소가 될 것이 명확하였다. 따라서, 그곳에 몰려들 인파를 상상하면, 사저 뒷산의 묘역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다. 더구나 사저 앞의 여러 건물들, 뒷산의 면적, 사저와의 관계를 현장에서 파악해본 결과 전직 대통령의 묘소로는 더욱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 위원회는 다른 곳을 알아보기로 하고 주변 일대를 답사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계속 한 곳에 눈길을 주게 되었다. 실은 위원장인 유홍준교수와 나는 현장에 내려가기 전부터 항공사진과 도면에서 적절한 위치를 이미 점 찍어 두고 있었는데, 봉화산의 지세가 흘러 내려 멈춘 산밑 둥이 경사진 부근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다른 사람의 소유여서 묘역으로 사용하는 일이 어렵다고 통보 받았다. 즉시 나는 내가 눈길을 준 곳을 제안하였다. 지금의 평지였다. ■ 봉화산의 높은 곳인 사자바위에 올라 보면,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멀리서부터 굽이 쳐 오면서 마을을 엮고, 일직선 상에서 이 평지의 삼각형 꼭지점과 맞닿는다. 그리고는 봉화산으로 연결되는 데 이 삼각형 모양의 평지야말로 마을과 자연을, 현실과 영원을 연결하는 듯한 매개점에 놓여 있으니, 산 자와 죽은 자가 만나는 묘역의 위치 상으로는 적격이었고 그 흐름도 안성맞춤이었다. 교통이나 주변의 여건으로 봐도 적지였고, 더구나 땅 안으로 흘러 드는 두 개의 물줄기가 이 땅의 성격을 이미 정해 놓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산지가 아니라 평지였다. 평지의 묘역. ■ 묘역이란 무엇일까? 인간은 육체(肉體)와 혼백(魂魄)으로 구성되어 있다. 살(Flesh)과 뼈(Skeleton)로 구성된 몸이라는 육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며, 육체의 죽은 상태인 주검은 묘(墓)에 묻힌다. 혼백이라는 것은 영어로는 Spirit과 Soul로 나뉘는데 마음이나 열정 등의 감정과 이성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백(soul) 은, 육체와 함께 움직이고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한다. 그러나 혼은 본디 자유로운 존재여서, 육체의 안과 밖을 넘나든다. 혼이 나가거나 얼이 빠지거나 하는 상태가 혼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설명하는 말이 된다. 육체가 죽으면 혼은 홀로 빠져 나와 구천을 헤맨다든지 천국에 간다든지 아니면 환생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종교적으로 다른 입장에서 정하는 바다. 구천에 떠 돌지 모르는 혼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사당에 묘(廟)로 모신다. 개인 집들의 사당이나 왕들의 혼령을 모신 종묘가 대표적 예이다. ■ 노무현 대통령의 경우는 화장례를 거행했으므로 유골분을 육체의 상징으로 묻어야 하니 납골분묘의 형식에 해당하겠지만, 이 묘역은 그 이상의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묘역은 노무현을 기념하는 장소여야 했다. 무엇일까? ■ 죽은 자를 기념하는 장소들을 떠올렸다. 스톡홀름에 있는 우드랜드(Woodland) 공동묘지의 ‘회상의 언덕(Glove of Remembrance’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시구드 레베렌츠(Sigurd Lewerentz, 1885-1975)의 최대 걸작인 이 공동묘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라고 알려진 곳이며, 실로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장대한 서사적 풍경을 만들고 있다. 그를 회고한 책자의 제목은 이를 성서적 풍경(Biblical Landscape)이라고 했다. 그 속에 있는 인공 언덕인 ‘회상의 언덕’에 오르면 느릅나무 열두 그루가 가운데 헌화소가 있는 정상부의 평지를 둘러싸고 있고, 가운데 길로 1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부활의 교회’까지 일직선의 길을 보게 한다. 죽음의 행로를 마주하며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장소인 이곳에 서게 되면, 사는 일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게 된다. 여기서는 삶의 행로가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남은 자의 가슴에 그대로 살아 진행되는 것이었다. ■ 또 하나는 간디의 묘소이다. 뉴델리에 있는 간디의 묘는 사실 육체의 흔적은 없으니 사당에 해당하는 곳으로, 40미터 정방형의 면적을 완벽히 비우고 둘레의 둔덕으로 막아 절대 고독 속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정 가운데 간디의 묘비만 놓여 있는 이 장소는, 참배객의 접근도 땅 속을 통하게 함으로써 절대 비움의 공간을 외부와 완벽히 다른 세계로 형성해 놓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무의 상태에서 철저히 스스로를 반추하게 한다. ■ 이뿐 아니라, 레닌과 모택동 묘, 심지어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스스로 목숨을 던진 포르트보(Portobou)의 절벽 등 내가 아는 모든 기념적 장소를 그 특별한 죽음의 의미와 함께 다시 기억해야 했고, 베니스의 산미켈레(San Michele) 묘지 섬과 스위스 쿠르(Chur)의 공동묘지, 모데나(Modena)의 산 카달도공동묘지와 이괄라다(Igualada) 납골묘원 등, 나를 매료시킨 죽음의 장소들도 다시 찾아,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 관계한 풍경을 다시 읽었다. ■ 노무현대통령이 국립묘지에 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역시 노무현다운 생각이었다. 그는 그렇게 초지일관했다. 추측컨대 아마도 범부처럼 묘소를 만들기를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그는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어쩔 수 없는 우상이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조성될 묘역의 모습은, 만약 우리 시대의 절제하지 못하는 못난 버릇에 맡겨진다면, 진정성 없는 절대우상화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을 나는 강력히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노무현을 희화화 할 뿐이다. 진정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종묘의 월대(月臺)에서 찾았다. ■ 종묘는 조선왕조의 신위를 모신 장소이다. 무려 600여 년 전에 지어지기 시작한 옛 건축이지만 세월이 바뀐 지금도 그 신위를 모시고, 매년 5월에는 대대적인 종묘제례가 공개적으로 거행되니,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건축이며 장소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적 건축인 종묘정전은 우선 그 크기가 압권이다. 동서로 117미터 남북으로 80미터의 담장이 두른 이 정전은 예상을 깬 그 길이가 주는 장중한 자태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정문인 남쪽의 신문을 들어서면 한 눈에 들어 오지 않는 길이의 기와지붕이 지면을 깊게 누르며 중력에 저항하고 있다. 지붕 밑의 깊고 짙은 그림자와 붉은 색의 열주는 이곳이 무한의 세계라는 듯 방문객을 빨아 들인다. 일순 방문객은 그 위엄에 가득 찬 모습에 침묵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 일본의 한 건축학자가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극찬한 이후 많은 일본의 건축가들과 학자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동일한 감탄사로 방문기를 적었지만, 그들이 말하는 것은 파르테논 같은 외관의 장중함이었을 게다. 그러나 종묘정전의 본질은 정전 자체의 시각적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바로 정전 앞의 비운 공간이 주는 비 물질의 아름다움에 있다. 이 공간은 일상의 높이에서 1미터 정도 돋아 있으며, 신위가 모셔진 곳으로부터 1.5미터 정도 내려와 있어, 마치 산 자와 죽은 자가 본원의 위치를 떠나 서로 만나게 되는 중간영역이다. 그래서 자못 경건하며 침묵이 전체를 지배한다. 이 긴장은 굳이 비교하자면 끝없이 넓은 사막의 고요나 천지창조 전의 침묵과 비교해야 한다. 그렇다. 가로 세로 109미터 69미터의 월대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비움 자체이며 절대적 공간이다. 이미 세속을 떠났으며, 담장 너머 주변은 울창한 수목으로 뒤덮여 있어 마치 진공의 상태에 있다. ■ 영혼이 움직이는 길인 가운데 길의 표정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듯 하며, 불규칙하게 깔린 바닥의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 도무지 일상의 공간이 아니며 현대 도시가 목표하는 기능적 건축이 아니다. 그래서 물신주의와는 반대의 편에 있으며 천민주의와는 담을 쌓고 있다. 바로 이 영혼의 공간은 우리 자신을 영원히 질문하게 하는 본질적 공간인 것이다. ■ 이 월대 같은 광장의 묘역. 노무현의 묘역으로서 적확한 형식이라고 판단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우리의 일상에 가까이 있는 장소요, 아무나 접근할 수 있지만 경건함을 유지하는 기념소이니 이보다 더 그를 기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 이미 유홍준 위원장은 봉분함의 디자인을 안규철교수에게 의뢰한 상태였고, 자신은 묘의 형식을 남방식 고인돌의 모습으로 그려 보였다. 그렇다면, 박석이 깔린 바닥 위에 봉분함을 덮은 너럭바위 같은 큰 돌이 있게 된다. 머리 속에 그림이 다가왔다. 황지우 선생은 비문에 대해, 애도하는 국민들이 써서 건 그 절절한 구절보다 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역시 탁견이었다. ■ 일천 평 남짓한 삼각형의 땅에는 두 개의 물줄기가 파여져 있었다. 이는 자연적으로 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전통적 제례형식의 공간구성에도 합당한 형상이었다. 예컨대, 조선 왕릉의 구성을 보면 홍살문이 있는 진입부와 정자각이 놓인 제향공간과 능침이 있는 참배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그 사이에 물줄기를 흐르게 하였으니, 주어진 부지는 이 제례의 진행에도 안성맞춤이어서 자연적으로 진입부분, 배례부분, 지석부분으로 나눌 수 있었다. ■ 또한 삼각형이라는 평면형태도 투시도법을 자연적으로 이용하게 하여 시각적 거리를 착시하게 하여, 진입하여 참배하는 과정을 보다 극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었다. 즉 삼각형의 꼭지점에서 밑변에 해당하는 건너편을 보게 되면 그 거리가 실제보다 가까워 보이니, 입구에서 보면 지석까지 시각적으로는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는 멀다. 물론 지석에서 입구 쪽을 보면 보는 것보다 거리는 더 가까워,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개념을-이를 인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시각적 효과로 실현할 수 있다. ■ 먼저, 이 영역을 한정하기 위해 경계부분에 벽체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는 전통묘역 능침 주변의 곡장(曲墻)에 해당한다. 나는 이 벽체를 내후성강판(耐候性鋼板)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 무도장강판 혹은 코르텐 스틸(Corten-Steel)이라고도 불리는 내후성강판은 특수합금이다. 이 금속은 교량이나 토목용 구조재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 5년 정도 산화된 표면의 녹이 피막이 되어 남아있는 내부의 철을 영구적으로 보호하는 철재이다. 철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계속 페인트를 칠할 필요가 없어 강이나 바다를 지나는 교량용으로 쓰이던 것을 국내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건축의 외부재료로 쓴 이후로 이제는 거의 보편화 되었다. ■ 이 재료는 처음에는 검정색이지만 표면이 부식이 되면서 붉은 색으로 변하다가 최종적으로는 암적색으로 정착된다. 매일 변하는 모습이 다르고, 햇빛과 그늘에 따라 달리 보이며, 비 오는 날에는 짙은 수묵의 색채를 보인다. 그 변하는 과정이 세월과 함께 하여 기억을 담기에는 이 만한 재료가 없다. 그러한 성질 때문에 이 재료의 벽체는 불현듯 긴장을 조성한다. 많은 기념적 시설에 이 재료를 쓰는 까닭이다. ■ 삼각형의 땅의 배후에는 봉화산 사자바위가 압도적 모습으로 버티고 있어 공간성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길이 60미터의 내후성 강판 벽을 설치함으로써 엄연히 바깥 영역과 경계를 이루며 내부공간의 존재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철재 벽에 대해 질문하였고, 아마도 그 질문은 생소함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런 생소함은 인식에 대한 것이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 봉분함을 덮는 고인돌 혹은 지석(誌石)을 놓는 방법은, 벽체의 내후성강판과 조화하기 위해, 내후성강판을 깔고 그 위에 바위를 얹는 방식으로 그렸다. 이는 지석을 다른 바닥 돌과 구별하게 하는 방법이며 철재의 곡장에 대한 대응일 수 있다. 이내 스케치가 그려졌다. ■ 바닥의 박석에 국민들이 애절하게 쓴 글들을 신청을 받아서 새기자고 제안했다. 그 때 내 머리 속을 맴도는 기억이 있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이 길은 그리스의 건축가 데메트리오스 피키오니스(Demetrios Pikionis, 1887-1968)가 설계한 것인데,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폐허에 널브러져 있는 조각난 돌들을 모아서, 하나하나 형상에 맞추어 콜라주 하듯 길 바닥 포장 디자인을 한 것이다. 어떤 곳은 마치 풍경 같고, 어떤 곳은 문자추상이며 더러는 정교한 패턴이고 또는 불규칙한 구성 속에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있다. 따라서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면서 그곳에 기록된 역사를 보는 듯 혹은 신화를 읽는 듯 하여, 길 자체가 거대한 역사서가 되었고, 그 풍경을 이름하여 ‘감성적 지형(Sentimental Topography)’이라 하였다. ■ 물론 박석에 새긴 글들은 언젠가는 마모되어 없어질 것이다. 그 점을 오히려 강조하고 싶었다. 모든 건축과 기념물들은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운 자의 영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아무리 튼튼하고 거대하게 세웠다고 해도 중력과 세월에 영구히 저항할 수 있는 건조물은 있을 수 없다. 남는 것은 기억이며 이것만이 진실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돌 위에 새긴 애절한 글 귀는 몇 년 후에는 사라질 것이다. 어떠한 명문이라도 그 글을 쓴 우리 자신이 가졌던 진실을 대신할 수 없으며 그 모든 가치에 대한 책임은 남은 자의 몫이 된다. ■ 글이 새겨진 박석이 깔린 월대, 사실 이 면은 수평면이 아니다. 월대는 일상적 지면으로부터 1.5미터 들어올려졌다. 처음에는 1미터 남짓 올리려 하였으나, 우기 침수를 염려하는 유족들의 심정을 이해하여 안전선보다 다소 높이 올렸다. 그러나 그 높아진 지형 때문에 월대 면의 높낮이를 충분히 의도적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 즉 입구마당에서 네 개의 계단- 하나의 계단과 세 개의 계단으로 분리했다. -으로 지면을 올리고 거기에서 저 멀리 있는 지석을 내려보게 만든 다음, 서서히 월대 면을 내려가게 해서 중간 영역인 헌화 분향대에 이르면 지석은 다시 올려보게 된다. 지석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완만한 경사면을 올라야 하고, 묘에 참배를 마치고 돌아 보면 지면은 이제 부드러운 구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월대의 면은 수평이 아니라, 그 속에서 아주 다양한 높낮이를 가지면서, 자연스럽게 참배객의 동선을 유도하고 각 영역의 성격을 분명하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 입구에는 수반을 두었다. 이는 전통적 공공건축에서는 방화수로 쓰기 위해 입구부분에 설치하는 관습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묘역의 북측에 있는 저수지로부터 내려오는 물줄기가 통과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 흐르는 물도 이 특별한 장소에 이르면 바로 흐르지 않도록, 잠시 가두었다가 다시 흐르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못이 생기게 된다. (높이 차이 때문에 이 물을 직접 받지는 못하였다.) ■ 이 수반은 그러한 기능적이고 위치적 특성 외에도 참배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복합적이다. 일상의 공간인 마을과 만나는 접점이고 매개점이다. 여기에 연꽃을 몇 개 띄우고 그 속에는 노대통령의 별자리를 조명등으로 심게 했다. ■ 6월10일에 다시 ‘작은 비석 위원회’가 모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 생각을 그린 스케치를 공개했다. 모두들 동의해 주었다. 특히 정기용 선생이 적극적으로 동의해 주었다. 아마도, 49재가 되는 날까지 일부분이라도 조성되어야 하는 시일의 촉박함이 동의를 압박했을 것이지만, 모두들 이 안의 진정성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이미 안규철 선생은 유분함 모형까지 만들어 보여주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석재를 조각한 것이었고 그 속에는 박영숙선생의 우아한 백자 항아리가 담기게 되어 있었다. ■ 지석을 받히는 강판 앞부분 위에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을 새기기로 하였는데, 어떤 글로 골라야 할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유홍준 위원장이 몇 개를 보여줬다. 내 눈에 금방 띄는 글 귀가 있었다. ■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 나는 이 글귀야 말로 노무현의 정치적 신념을 압축한 것이라고 느꼈고 적극 추천했다. 글씨는 신영복 선생에게 청하기로 했다. 묘비 명은 바위 위에 바로 쓰기로 하고 지관스님의 글씨를 받기로 하였는데, 받은 결과, 참 소박한 글씨였고 잘 어울렸다. ■ 며칠 지난 후, 다시 봉하로 내려가 유족들에게 우리가 그린 초안의 묘역을 설명하게 되었다. 그분들에게 이 안는 대단히 생소했을 게 틀림없었다. 많은 이야기가 조심스럽게 오가고 난 후, 동의를 받았다. 설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확신이 없었을 것이다. 다만, 유족들은 사람들을 믿었다. 나는 더 큰 부담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 49재가 치러지기 사흘 전, 묘역조성에 대한 기자회견이 봉하마을에서 있었다. 유홍준 위원장은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 라는 한마디로 묘역조성의 개념을 설명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대단한 레토릭이었다. ■ 묘역의 면적은 천 평에 가까우니 어떻게 보면 ‘작은 비석’에 반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은 묘 자체만으로는 5평이라 작다. 그것도 돌 하나가 얹혀 있을 뿐이어서 지극히 검소하다. 그러나 이 묘를 한정하는 공간은, 죽은 자를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산 자인 우리 모두를 위한 광장으로 쓰이는 천 평의 넓이이며, 또한 이 공간은 주변의 산지와 농지로 확장되니 그 느낌은 대단히 크다. 그래서 결코 누추하지 않다. 돌의 정교한 세공이 필요한 묘역은 자칫하면 화려해지기 쉽다. 여기서는 극도로 절제될 것이고 비움을 주제로 구축될 공간이어서 사치와는 엄연한 거리가 있다. 나는 다시 되뇌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 ■ 49재 때는 촉박한 시일인 만큼, 묘역은 아주 작은 부분만 만들어졌다. 배경의 철판 벽도 30미터의 길이로만 세워졌고 유분이 안치된 지석 주변의 최소부분만 이루어졌다. 수평의 풍경을 저해할까 망설인 끝에, 조명탑을 겸한 국기게양대도 결국 세웠다. 전체 바닥은 물론 성토된 흙이었다. 참으로 초라한 모습이었다. 묘지는 이미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되었으나, 그 격으로는 현저히 모자랐다. 노대통령을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비난이 빗발쳤다. 기다리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 사이는 성토된 땅이 다져지는 기간이었고, 나는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더욱 정교한 디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 정영선 선생은 주변 조경을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고 이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비자나무를 더불어 심자고 제안했다. 이론이 있을 수 없었다. 큰 나무들을 심어 처음부터 완성된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은 내 욕심일 뿐일 게다. ■ 중요한 것은 박석으로 포장되는 표면의 표정이었다. 나는 임옥상 선생에게 그 그림을 그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한참이 지나도 그림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능히 짐작되었다. 그는 내가 그릴 수 있음에도 굳이 부탁한 것을 잘 아는 터였다. 독촉을 받은 그가 드디어 가져온 그림의 제목은 ‘사람 사는 세상’이었고 어떤 마을의 거리 평면도였다. 놀라왔다. 정확하게 내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큰 길과 작은 길들이 있으며 구역도 있고 공동체도 보였다. 돌들 사이는 골목길로 인식되었고 간간히 마을의 마당과 구부러지고 휘어진 공간도 있었다. 우리는 쉽게 합의하였다. 길들은 글들이 새겨지는 사각형 박석으로, 공간과 집들은 불규칙한 자연 박석으로 하기로 하였다. ■ 글씨가 새겨질 돌의 개수를 세어 1만 개의 박석을 국민모금을 통해 마련하도록 캠페인을 시작하도록 노무현 재단 측에 요청했다. 홍보도 하지 않고 재단의 게시판에 공고한 것 만으로도, 시작한 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아 숫자가 다 채워졌고, 빗발치는 요구로 오천 개를 더 만들어줄 것을 요청 받게 된다. 미술이라면,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설치미술이었다. ■ 참배를 마친 이들이, 바닥에 쓰여진 글들을 읽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이 월대 위를 이리저리 소요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기억을 더듬고 다른 이의 마음을 읽고 나누는 그 장면이야말로 기억의 마을을 거니는 이들의 아름다운 풍경 아닐까? ■ 모든 준비가 끝나고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올해 초였다. 1주기 전에 완공이 되어야 하니 손끝이 모두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석공사를 맡은 금강석재의 윤태중사장은, 마치 소명인 듯 만사를 팽개치고 그의 큰 몸집만큼 믿음직스럽게 움직였고, 강판 벽을 세우는 동인 E&C의 김천식사장의 충직함은 놀라왔다. 분향로 같은 철물을 제작한 최가철물의 최홍규사장은 연일 자기 작업에 대한 평가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특히 김경수 비서관과 이성호 비서관의 깍듯한 성실함은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모두들 자기 자신의 일이었다. 그렇게 완공되었다. ■ 1주기 날이었다. 1주기 기념식 겸 묘역준공식의 행사 참석을 위해 ‘작은 비석 위원회’ 사람들이 함께 기차에 올랐다. 마음들이 무겁진 않은 듯 했다. 묘역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아는 까닭이었고 따라서 1년 동안의 무거운 짐을 벗는 날이기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연신 마음이 졸여왔다. ■ 가차 안에서 유홍준 위원장은 행사에 낭독할 묘역의 헌정사를 연신 고쳐가며 익히고 있었다. 우리는 이 묘역의 명칭을 어떻게 정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돌이 깔린 뜰이란 뜻에서 무슨 석원이라는 게 좋겠다는 데까지는 쉬웠지만 그 앞의 글자가 문제였다. 그러다 유위원장이 소석원(小石園)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돌이 깔린 작은 정원. 평범한 듯 하지만 깊은 사려가 배어있는 이름이었다. ■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줄곧 오고 있었다. 비옷을 입었지만 빗물은 온몸을 적시는 듯 했다. 봉하마을은 비와 사람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럼에도 행사는 차질 없이 진행 되었다. 내가 온 신경을 집중하며 보는 것은 따로 있었는데, 이 묘역에서 처음으로 제례를 행하는 유족들의 표정이었다. ■ 이윽고, 권양숙여사가 아들과 함께 분향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4미터 길이 화강석 통돌로 된 분향대 뒤에 섰다.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강판의 곡장과 나지막한 구릉 위 지석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질곡의 세월을 견딘 아내로서 처음 마주 하게 된, 사랑하는 남편의 안식처였다. 강판 벽은 빗물에 적셔져 깊은 검정이었고 광야처럼 비워진 공간 가운데 지석의 표면은 부딪히는 빗물에 빛이 산란되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나만 느꼈을 지도 모른다. 스크린에 비친 그 순간의 표정만으로도 나는 긴 호흡을 했고 편안해졌다. 긴장된 지난 1년이었던 것이다. ■ 조기숙 전수석이 묘역에 대해 여러 사람이 있는 가운데서 내게 질문한 적이 있다. 강판 벽의 의미에 대해서였다. 나는 전통적 곡장의 기능과 미학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대답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생소함에 대해서다. 그도 생소하게 느꼈으니까 물었을 것이다. 그렇다. 이 묘역은 생소하기 짝이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있지 않던 방식이며 익숙하지 않았던 장소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소함이 타성을 짓누르게 하고 우리를 일깨울 것이다. 그게, 스스로를 추방한 노무현의 삶의 방식 아니었을까? ■ 우리가 삶의 곤고함에 눌려 부조리에 굴종할 때, 찌꺼기 같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부패에 동조할 때, 나태에 빠져 새롭게 되는 것을 거부할 때, 그는 생소하게 우리에게 소리치며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 이 장소는 국가지정보존묘지 노무현대통령의 묘역이다. 온갖 정치적 역정과 유난한 삶을 마친 그였기에, 그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이 찾게 될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증과 이해로만 이 장소가 존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욱이 어느 정파나 이념의 포로가 되는 장소로만 머문다면 이곳은 욕되고 욕되다. ■ 이 장소는,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었든 같은 시대 속에서 나의 존재가 다른 이들의 풍경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그래서 같은 공동체를 만들었음을 기억하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모두가 보편적 가치를 구하는 곳이며, 결국 우리 자신의 성찰을 구하는 장소로, 성찰적 풍경(meta-landscape)으로 만들어졌다. 누구든지 자기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고자 할 때, 그리고 그로 인해 고독하고 적막할 때 여기를 찾아 월대 위에 서서 위안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함으로 이 장소는 노무현 대통령의 묘역이라는 한계를 너머, 우리 모두를 위한 장소가 된다. 다시 말하면 이 장소는 스스로를 추방한 모두를 위한 풍경이며, 그렇게 우리의 선한 기억에 오래 머물기를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