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rban void

2002. 8. 27

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수 많은 새로운 도시가 근세 이후에 세계 곳곳에 세워져 왔다. 어떤 경우든 건축가나 도시계획가가 생각하는 이상 도시의 건설을 목표로 한 작업이었다. 그 작업은 통계적 수치를 들이대고 적절한 밀도의 유지와 원활한 교통의 흐름, 풍부한 일조량의 확보 등을 주장하며, 마스터플랜이라는 전지전능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전능의 환상 속에는 냉소적 현실이 감추어 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모든 도시들은 등급이 매겨진 도로들을 가지게 되었고 용도로 구분된 토지가 붉은 색 푸른 색 등으로 나타났으며 도심과 부도심, 변두리 등으로 우리의 삶도 계급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온갖 갈등과 소와는 이 새로운 도시의 일상이 되었으며 우리는 바야흐로 공동체의 위기에 직면해 있게 된 것이다. 이게 전능의 도시인가.
이제 우리는 그 새로운 도시를 만든 방법론을 의심한다. 과연 우리의 이성은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가 하는 것이다. 드디어 많은 이들이 이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게 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서양의 많은 지식인들은 이제 그 탈주로를 동양의 과거에서 찾아 이를 다시 포장하여 새로운 시대 새로운 이념으로 등장시키고도 있다. 마치 우리에게 이성은 과연 낡은 폐기물이 되어야 하며 신비하고 오묘한 동양의 사상이 다시 현실의 세계를 지배하여야 하는 것처럼 이 가설은 열병같이 번졌다. 그것은 퇴행이다.
나는 이성의 힘을 전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우연의 경우에 내 맡겨 지는 것을 긍정할 수 없다. 그러한 신비주의는 환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루카치의 말은 빌리면 그것은 기만이며 사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성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며 그 이성적 판단이 초래할 모순을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이성을 의심하는 것. 이를 바탕으로 하는 건축은 새로운 개념을 형성할 수 밖에 없으며, 이성에 대한 과신과 맹종으로 만들어진 기념비적 건축 시대인 과거와 결별하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에드워드 브루의 말을 인용하면,
‘ 오늘날의 도시에서 빈 공간들은 대개 남겨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공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두 물체사이의 공간이다. 그 공간의 점유가 불가능해 지도록 어떤 결정되지 않은 긴장이 실재한 결과이다. 따라서 요즘의 비어있는 공간에 대한 사고는 urban void로 옮겨져야 하며 그 의미는 이 비움을 만드는 긴장 속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가 그의 말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건축은 긴장을 만드는 일이 중요해 진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긴장인가.
리챠드 세라는 공간을 물질로 응시한다. 그가 만드는 철제 덩이는 오히려 그 물질 속에 비워진 공간이며 중력의 크기를 우리에게 느끼게 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보잘 것 없던 자연도 그가 던진 공간 속에 의미심장하게 변한다. 바로 그의 중력이 남겨져 있던 공간 속에 심각한 긴장을 조성하여 전혀 새로운 관계와 질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라헬 화이트리드는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공간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건축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 건축 속의 공간을 오히려 주조함으로써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비물질을 물질화 시킨다. 마치 공간은 남겨진 것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며 실재하는 것임을 강변하고 있다.
서양의 건축가들이 비움의 실체로 인용하는 료안지의 마당은 바로 라헬 화이트리드의 공간 인식과 같지 않을까. 비어 있지만 아무도 들어갈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여 질 수 없으며 마치 투명한 얼음 덩이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료안지의 마당은 공간의 물질성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다. 무거운 고요와 정적에 휘감긴 그 마당은 비움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조우하게 한다.
그러나 그 비움은 냉동된 비움이며 오래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일상에서 죽어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옛 집에 만들어진 마당은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비움이며 항상 그 형상과 기능이 결정되지 않았지만 그 불확정성이 긴장을 조성하며 창조적이고도 특별한 기억을 만들게 한다. 그것이 에드워드 브루가 강조하는 urban void 의 보다 본질적 실체가 아닐까.

말라케시나 페즈 같은 이슬람의 도시를 보면 미로 같은 도로망을 가지고 ㅁ 자형의 주거 단위들이 벌집처럼 붙어 있다. 물론 광로나 대로 같은 도로가 있을 수 없고 도심이나 부도심도 없다. 광장이나 공원도 없으며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역 같은 용도구분도 없다. 모두가 고만 고만하며 모두가 평등하다. 그러나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한 곳도 같은 곳이 없는 변화무쌍에 놀라게 된다. 때로는 어둡고 때로는 음침하지만 수시로 넓었다 좁아졌다 하는 부정형의 길은 단순한 통행의 목적이 아니라 이들 도시의 공동체적 공간이며 이들을 살아 숨쉬게 하는 urban void이다. 특히 이들의 작은 주택 속으로 들어가면 하늘에서 하염없이 밝은 햇살이 떨어지는 마당을 만난다. 그들에게 이 비움은 생명 자체인 것이다.
이 도시를 보기 위해서 전부를 파악할 필요가 없다. 단지 일부만 보면 전체 도시를 알 수 있다. 즉 도시의 부분이 전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물론 전능의 마스터 플랜이 여기서 필요할 리가 없다. 가장 중요한 일은 void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void는 그들의 존재 자체이다.

건축 속의 마당이나 비어진 공간 만이 void 라고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건축과 건축 사이의 틈이 도시에서는 더욱 중요하며 도시와 건축, 도시의 지역과 지역 사이의 빈 터도 중요하다. 우리는 지난 번 자동차로 점유 되던 도로마저 도시의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urban void 가 포괄하는 범위는 이 보다 더욱 크다. 작은 방 속에서도 도시적 속성을 가진 빈 터는 존재하며 심지어는 건축의 벽면이나 재료 속에서도 이 urban void 는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비어진 곳에 조성된 새로운 긴장이며 그로 인해 만들어진 새로운 장소성이다.
건축은 이른 바 삶의 시스템에 대한 현실체이며 우리들 삶의 하부구조라는 명제에 확실히 동의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의 세계이며 상상 속에만 남아 있다. 우리가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이다. 그리고는 속속 다가오는 시간과 마주하며 긴장하게 된다.
나의 작업은 이를 위한 장소를 그리는 것이며 그를 건축의 언어로 기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