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 대해 생각할 때 마다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길이 있다. 이제는 어쩌면 실제보다 좀 더 과장된 상상을 하고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드라도, 믿기로는 이 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바로 대구의 달성군 유가면에 있는 유가사라는 이름의 절로 이르는 길이다. 고졸한 풍취를 가진 유가사는 어디선가 비파와 거문고의 화음이 들린다는 이름의 비슬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산을 오르는 길은 콘크리트 막 포장으로 되어있어 조잡하게 개발된 여느 등산로처럼 멋대가리 없지만, 이 등산로가 돌아가는 도중에 유가사로 들어가는 길을 보는 순간 범상치 않은 긴장을 느끼게 된다. 유가사 입구라는 작은 팻말이 없으면 도무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 정도로 이 절의 입구는 소리 내지 않는다. 그 팻말이 가르키는 대로 입구를 찾기 위하여 부근을 두리 번 거리면, 울창한 나무 사이에 널 부러져 있는 큰 돌들 속에서 몇 몇 돌들이 어슴프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바로 사람들의 발길이 돌들의 표면들을 갈아서 만든 자국인데, 그 정경은 마치 세속의 인간들을 정적의 세계로 이끄는 오묘한 불 빛과 같다. 그 여린 빛들을 다칠까 염려하며 숨죽이며 그 돌들을 딛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노라면 어느새 이 돌들의 바다는 끝이 나고 이내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다. 다시 잘 살피면 오솔길이 보이긴 하는데 있는 둥 마는 둥 그 흔적만 있다. 의심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끔 된 이 부실한 길을 따라 오르면 이윽고 자그만 돌 계단이 멀리 보인다. 아 내 발걸음이 틀리진 않았나 보다. 작아진 마음을 다독거리며 아무렇게나 쌓은 듯한 돌 계단을 오르면 아뿔싸 이내 또 길은 사라지고 드문 발길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도무지 길 같지 않은 길이며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야생의 풀들과 꽃들에게 위안을 받으며 한 구비를 돌면 드디어 저 멀리 천왕문이 있다. 맞았다. 비록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지만 나는 내 마음의 길을 걸었구나.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하며 천왕문을 들어선다. 근데, 이 애처롭게 아름다운 길 – 때로는 돌 계단으로 때로는 흙으로, 들풀로 혹은 징검돌로 이루어져 끊일 듯 보일 듯 있을 듯한 이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길은 여느 절의 길처럼 대웅전을 향해 있는 게 아니라, 대웅전을 오른 편으로 비키고 그 뒤의 나한전도 왼편에 비키고 연 이어 있는 용화전과 산신각 마저도 비켜서 저 멀리 비슬산 중으로 올라가는 듯 하다가 끝내는 아스라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산신각 곁에 서서 감동하고 있었다. 그래 절로 가는 아름다운 마음이 기껏 대웅전을 참배하는 것으로 끝난다 해서야 세속의 길과 어찌 다를 바가 있을 것인가. 종교가 우리의 삶에 대한 성찰이 목표라면 절로 가는 길은 그 종점이 있을 수 없는 게다. 여태 나는 보이는 길만 걸었고 목적지를 가져야만 걸었지 않았을까. 어찌하여 걷는다는 자체를 즐거워하지 않을까. 나는 깨닫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보이지 않는 길’은 나의 삶에 잊혀지지 않는 길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길은 반드시 보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이지 않는 길은 특히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길이 아니다. 지도를 보면 안다. 특히 요즘에 만들어지는 지도에서는 길의 표시가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지도에는 길의 종류도 한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간선도로나 대로, 중로, 소로 등이 굵기와 색깔에 의해 달리 표현되어 있고 번호와 함께 등급까지 매겨져 있는 것이다. 또한 관리하는 주체도 달라서 중요한 길은 국가가 관리하고 지방으로 내려 갈수록 덜 중요한 길이 된다. 그러다 보니 어쩐지 큰 도로 변에 면해 있는 집들은 땅값도 비싸고 크고 중요한 집들이 대부분이며 작은 길에는 싸고 덜 중요한 집들이 모여 있는 듯 하다. 중요한 사람들은 큰 길가에 모여 살고 덜 중요한 이들은 작은 길가에 모여 산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길의 크기에 따라 사람의 계급이 매겨지고 있는 것 아닌가.
더욱이 이런 길은 어떤 장소를 연결하는 기능보다는 지역을 가르는 경계의 역할이 더욱 크게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도시의 지역을 용도로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길은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의 경계가 되며 공업지역과 녹지지구를 가르고 개발제한과 개발촉진을 분리하기도 한다. 따라서 길의 구획에 의해서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살기도 하여 그 길은 넘어서는 안될 선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개 이런 길들은 직선이다. 그리고 수 많은 붉은 색의 경고 표시와 부주의에 대한 문구들이 우리를 부단히 위협하고 있다. 우리들 인간은 재화와 상품들을 나르는 차들에게는 참으로 성가신 방해물일 뿐이다. 우리들도 될 수 있으면 빠른 시간 내에 이 길의 공포에서 벗어 나기를 원하므로 더 이상 이 길들은 우리의 삶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를 적대하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우리들만을 위한다는 길들도 있다. 보행자 전용도로라는 이름으로 된 이 길은 어쩐지 우울하다. 마치 우리가 이 길 밖으로 나가면 수 도 없이 많은 위험한 흉기와 괴물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듯 우리의 삶을 가두고 있는 것 아닌가.
더욱 큰 문제는 새로운 도시를 만들면서도 이러한 등급과 분류의 방식을 더욱 강조해 가고 있는 일이다. 근래에 우리의 이 땅에 만들어 진 도시들이 죄다 그러하다. 분당이며, 일산이며 산본이며 도무지 그러한 도시 안에 들어서면 어느 도시에 들어와 있는 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똑 같은 풍경의 길들을 만들고 있다. 아마도 이런 도시를 만든 이들은 같은 교과서를 배운 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도시의 역사에 관한 책들을 보면 첫 장에 대개 이집트의 도시가 언급된다. 그 전에도 인간의 모듬살이는 있었으련만 아무래도 도시의 구조를 이야기 하기에는 부족한 모양이다. 기원 전 2,3천년 전에 건설된 이집트의 도시는 우선 직선의 도로가 중심에 수직으로 놓여 있고 이 강한 축을 의지하여 주 공간과 부 공간으로 구분된 공간 구조가 체계를 가지게 되며 다른 직선의 도로가 이 중심도로를 직교하면서 도시를 형성한다. 즉 완벽한 위계를 바탕으로 도시의 도로와 공간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주된 길이나 주 공간 가까이 사는 이들은 대개 권력자요 귀족이며 이 직선의 길에서 멀어질수록 천하고 약한 이들이 살게 마련이다.
혹시 이러한 위계적 도시 구성논리가 서양 도시들의 원전이 아닐까. 나아가서 이 체계가 서양인들의 중요한 덕목인 이성과 논리 그리고 기독교적 위계가치 등을 바탕으로 그네들 삶의 배경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것이 현대도시 이론을 구성하게 하고 소위 제 3세계에 속한 우리들이 그 이론을 학습하여 그 논리를 바탕으로 이 땅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거나 혹은 우리 선조들이 오랫동안 다르게 살아 왔던 도시를 개조하려 드는 게 아닐까. 나의 의심과 상상은 끝날 줄 모른다. 이 이집트의 길들은 단순하고 명료하다. 도무지 구부러지지도 않고 애매한 곳이 없어 어떤 길을 가든지 자기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미로가 있을 수 없는 도시인 것이다. 미로란 무엇일까.
파리에서 남서부 쪽으로 내려 가면 샤르트르 성당이 있다. 이 샤르트르 성당은 초기 고딕건축의 폭발적 상승감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걸작의 건축이다. 이 성당의 내부를 들어서면 내부공간의 경건함이 방문자들이 신앙인이건 아니건 순간적으로 신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든다. 그 내부의 대리석 바닥의 가운데 통로에, 정면에 뚫어져 있는 스테인드 그라스의 로즈 윈도우와 정확하게 크기가 같은 미로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 작은 원을 중심으로 일곱인가 여덟인가의 동심원이 같은 굵기와 폭으로 만들어져 그 끝 부분들의 방향을 틀면서 미로를 만든다. 애초의 순례자들은 무릎을 꿇고 이 미로의 가운데를 향하며 처음의 입구에서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한다. 중심원에 다다르기 위하여서다. 그러나 중심원에 거의 다다랐다고 여긴 순간 미로의 방향은 다시 중심원과 멀어지기 시작하고 끝내는 가장 바깥 둘레에 오게 되어 다시 중심원으로 향한 순례를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일곱 차례나 거친 이후, 무릎의 고통이 극에 달한 이후에야 비로소 중심에 다다르게 되는데 그 길이가 정확히 이 성당 높이의 10배라고 한다. 그러나 순례자는 최대의 희열을 가슴에 안는 순간일 게 분명하다.
이 성당을 요즘 방문하는 이들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발 걸음으로 미로의 구획들을 쉽게 넘으면서 순간적으로 중심의 원에 다다른다. 혹은 그러한 미로가 그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것을 잘 알지도 모른체 무심히 그 미로를 무시하며 관통해 버리는 것이다.
물론 서양의 도시 이론을 근거로 만들어 지는 우리의 신도시에서 이 미로는 반 도시적이요 의심할 바 없는 금기 사항일 게 틀림이 없다. 이러한 미로를 제거하고 직선의 길을 만드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능적이고 편리한 삶을 보장해 주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 일 게다. 그러나 그런 편리라는 말이 행복한 삶과 동의어가 아니며 더욱이 우리가 살아야 할 지혜로운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몇 해 전, 모로코의 도시들을 보면서 우리의 잘못된 도시에 대한 생각을 나는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말라케시나 페즈 같은 도시들을 항공 촬영한 사진을 보면 마치 사각형 단위들이 모여 만든 벌집 같은 구성을 볼 수 있다. 여기에는 굵고 긴 직선의 길이 존재할 수 없으며 위계나 등급은 따질 수 조차 없다. 물론 광장이나 중심축이 있을 수 없고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역 같은 용도의 구분도 불가능하다. 각 단위들의 크기가 다소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으로 모든 이들이 똑 같은 가치를 가진다. 길들은 좁고 어두우며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 지 좀체 알 수 없다.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의 연속이어서 비록 좁고 어둡지만 이 길 속에서 이들의 여러 형태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사장도 되고 놀이터도 되며 공회당도 되고 토론장도 되는 이 길들은 이들에게는 건강한 피가 쉴 새 없이 흐르는 핏줄과 같은 조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일목요연할 수 없어 처음 방문하는 이들은 안내자 없으면 언제 이 미궁 같은 도시를 빠져 나올 수 있을 지 알 도리가 없다. 즉 보이지 않는 길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길이 막혀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진 길을 걷고 있다. 여기서는 어쩌면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이들의 삶이며 일상이므로 이 길들은 이들에게는 과정이 아니라 목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우리에게도 참 아름다운 길이 많았을 것이다. 대 도시 서울에서도 지금도 남아 있는 가회동이나 인사동의 골목길은 아직도 그 아름다운 정취가 만만찮다. 그렇게 오래된 길만이 아니라 근래에 도 그런 길을 볼 수 있는 곳이 있긴 하다. 바로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의 길들을 보면 우리가 원래 어떻게 길에 대한 생각을 가졌던 가를 잘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길은 선이 아니라 공간이며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머무는 곳이고,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니라 마음으로 느끼는 곳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들은 여전히 개발이라는 전가의 보도 앞에 맥없이 허물어지고 제거되고 지워지며 직선으로 뭉개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마음으로 걷는 길이 없어진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우리를 길에서 내 모는 대로와 광로들이 수 많은 경고 표지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의 길을 갖지 못하게 된 우리의 삶은 연결되지 못해 파편적이며 가두어진 체 때로는 방황하고 때로는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길은 좁을 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 수록 좋다’ 라고 김수근 선생이 이미 말씀 하셨던가. 길을 다시 구부리고 좁게 만들고 어둡게 하자. 유가사의 길처럼 보이지 않는 길도 만들고 샤르트르의 미로처럼 지혜를 찾는 길도 만들자. 그래서 그 속에서 우리의 삶이 뿌리내려 기억을 만들고 이야기를 쓰며 이웃을 잇게 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우리의 삶이 정착하게 하자. 그것이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찾는 진실한 길일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