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treat Center for Order of St. Benedict Waegwan Abbey

왜관수도원 피정의 집
ChurchDormitoryHotelTraining Facility
완공년도2024
위치경상북도 칠곡
대지면적39,279m²
건축면적1,594.42㎡
연면적4,962㎡
Structural engineer더나은구조
Mechanical engineer디이테크
Electrical engineer우림전기
Contractor이안알앤씨
Lighting design뉴라이트
Landscape디자인스튜디오 loci
완공년도2024
위치경상북도 칠곡
대지면적39,279m²
건축면적1,594.42㎡
연면적4,962㎡
Structural engineer더나은구조
Mechanical engineer디이테크
Electrical engineer우림전기
Contractor이안알앤씨
Lighting design뉴라이트
Landscape디자인스튜디오 loci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너희는 이제 평화하라

 

13세기 초에 지어진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은 고딕 양식의 대표적 건축으로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출생하면서 입었다는 옷을 보관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이 성당의 정문 안쪽 바닥에는 13미터 직경의 미로가 새겨져 있다. 요즘의 방문자 대부분은 이 미로의 존재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제단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옛날 이곳에 들어오는 이들은 무릎을 꿇고 미로 입구부터 12개 동심원의 길을 다 기어가 중앙에 다다른 후 기도를 올리고서야 드디어 일어나 앞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260미터가 넘는 그 좁은 미로의 통로를 다 기어 지나가자면 무릎은 피투성이가 되기 마련이었지만, 이 고통의 의식은 당연한 절차였다.

장양이라는 중국인 감독이 2016년에 제작한 영화 ‘영혼의 순례길’은 티벳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세 가족 11명이 순례를 떠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성의 로드무비인데 감동적이기 짝이 없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와 어린 딸, 죽음을 앞 둔 노인 그리고 살생의 죄를 씻고 싶어 하는 백정도 포함된 이들은 서로 다른 소망을 품은 채 성지 라싸와 성산 카일라스산으로 1년동안 2,500Km에 달하는 멀고도 먼 길을, 세 걸음 마다 온몸을 땅에 던지며 간다. 오체투지. 도중에 출산을 하고 노인은 죽음을 맞기도 하는 등 순례길 자체가 삶의 과정이었다. 기도문을 외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지만 순례의 행로는 거칠기 짝이 없다. 비탈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길은 더러는 비포장이기도 하고 또는 물길에 잠겨 있기도 한데 어떤 경우든 이들은 긍정적이다. 짐을 끌던 트랙터가 교통사고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짐수레를 몸으로 끌며 숨차게 가면서도 삼보일배의 오체투지를 멈추지 않는다. ‘순례는 타인을 위한 기도의 길이며 모두의 안녕과 행복을 먼저 빌고 자신의 소원을 비는 것’이라고 믿는 그들, 온몸으로 그 거친 길을 닦는다. 修道. 그렇다. 수도라는 것은 몸에 고통을 가하여 길을 닦는 일이다. 가만히 앉아 도를 통하는 일이 아니라 육신을 분질러서 치러내는 고생이며 절박함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나긴 고통의 순례 끝에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평화. 평화일 게다. 가톨릭교계에서 많이 쓰는, 십자가에 장식된 ‘P’가 바로 평화peace를 뜻한다. 예수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처음 한 말도 이 말이었다. 너희는 평화하라…….

그런데 한자의 ‘平和’와 영어 ‘peace’는 그 의미가 좀 다르다. ‘平和’의 ‘평平’은 수면 위에 크기가 비슷한 수초들이 떠 있는 모습으로, 다소 크기 차이는 있지만 균형을 이루는 상태를 뜻한다고 했다. 만약 어떤 수초가 커지면 균형은 곧 깨어지기 마련이어서, 그 평화는 늘 불완전하다. 반면에 영어 ‘peace’의 어원을 따지자면, 그 동사형이 정벌한다는 뜻인 ‘pacify’이니 ‘peace’는 무력으로 상대를 눌러서 얻는 평화라는 뜻이 된다. ‘팍스 로마나’나 ‘팍스 아메리카나’가 바로 그들의 힘에 의한 평화인데, 로마의 멸망과 더불어 팍스 로마나는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이 힘이 영원하고 불변한다면 영원한 평화가 있을 것인데, 이는 절대적이고 전능한 신의 권위로만 이룰 수 있는 것, 그것이 종교의 세계며 그 은혜를 입고자 하면 우리는 신앙인이 되어 신의 계율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세속의 우리는 악마가 들려주는 달콤한 말에 쉽게 넘어가 이 진실을 곧잘 잊어버리는 탓에 평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평화를 얻기 위하여, 절대자에게 완전히 항복하기 위하여 결연히 세속을 떠나는 이들이 수도자다. 절박한 그들은, 육체와 물질과 정신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동정을 지키고 청빈하고 순종하는 삶을 산다. 절박함. 세상의 유혹에 곧잘 귀 기울이는 습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삶을 오직 경외할 뿐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1952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나 그 설립은 순교와 헌신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다. 전 세계에 베네딕도회를 조직하는 21개 연합회 중 하나인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연합회는 1884년에 설립되었는데 설립한지 25년이 되는 1909년 운명이 다한 대한제국의 땅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서울 혜화동 일원에 백동 수도원을 세운 게 그 역사의 시작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원산으로 옮겨 덕원 수도원을 세웠고, 만주 연길까지 진출하여 성십자가 수도원을 세우며 한반도에 복음을 전파했지만 해방후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탄압받아 순교하거나 추방되고 만다.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수도사들은 덕원과 비슷한 풍경을 찾아 왜관에서 수도공동체를 다시 세운 것이 1952년이었다.

지금의 왜관수도원은 왜관 본원 뿐 아니라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 분원을 가지고 있는데 미국의 뉴저지에 있는 뉴튼수도원도 관활분원으로 두고 있을 정도로 큰 아빠스좌 수도원이다. 아빠스는 베네딕도 규칙서를 따르는 수도회 중에 규모가 큰 자립 수도원 즉 대수도원의 원장을 뜻한다. 왜관역 부근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수차례의 도시계획에 의해 많은 땅이 잘려 나갔지만 현재에도 2만평이 넘는 땅 위에 정통적 수도원에 요구되는 각종 시설을 완벽히 갖춘 모습, 이른 바 스스로 추방한 자들을 위한 마을이며 평화가 가득한 곳이다. 내가 맨 처음 피정센터의 설계를 의뢰받고 처음 방문했을 때, 마치 중세시대에 유럽지역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던 프랑스 클루니수도원을 이 땅에서 보는 듯 혹은 생갈렌수도원의 도서관에서 발견된 수도원 도면의 실체를 보는 듯, 이 땅에도 이런 시설이 있다니… 큰 감동을 받았다. 무엇보다 소명을 받아 스스로를 이곳으로 추방하여 정진하는 백명 가까운 수도자들, 순명하는 그들의 삶을 보며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 세상에 아직 희망이 있구나….

 

 

피정센터

경계 위의 집

 

이 왜관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프랑스의 선교사들에 의해 1928년에 지어진 구성당이다. 남한으로 피난 온 수도자들이 이곳에 모여 수도생활을 다시 시작했다고 하니 왜관수도원의 모태적 건축인 셈이다. 서양의 역사건축 편린들을 다시 구성한 것이라 건축적 성취를 평가할 수는 없어도 근 백년 가까운 세월 속에 이곳을 지키며 새겨온 시간의 흔적은 이 건축을 너무도 빛나게 하고 있었다. 건축은 정제되었고 기품은 당당했다. 그리고 그 왼쪽 앞에 수도원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성물을 판매하는 ‘기념품의 집’이 있는데 1935년에 사무실로 지어져 왜관 최초의 유치원으로도 쓰였다고 했다. 또한 왜관수도원의 시작과 함께 1952년에 지어진 오른쪽 옆 건물은 그 당시의 임시수도원이었다가 사제관으로 쓰였다고 하니 귀하고 아름다운 기억의 유산이며 모두가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오래된 미래였다.

물론 이들은 수도원 현재의 시설 전체로 보면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본당과 각종 사무실, 수도사 숙소 등으로 이뤄진 본관은 2007년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어 2009년 오틸리엔 수도원 선교사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맞이 하며 새롭게 지었는데 이곳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그리고 그 주변에 각종 공방들이 마치 산업단지를 방불케 할 정도의 작지 않은 스케일을 가지고 있다. 유명한 분도출판사의 인쇄 공장이 있고, 다른 곳으로도 공급하는 가구를 만드는 목공장과 스테인드글라스 공방, 금속 공예 공장, 또한 분도푸드라는 상표를 내걸고 생산하는 소시지 가공 공장, 그리고 와인 주조 공장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심지어는 수도사들을 위한 묘역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작지만 하나의 완전한 도시이다. 다만 여기에 지어진 건축들이 일관된 개념과 원칙으로 만든 게 아니어서 서로 다소 부딪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마저도 이곳의 아름다운 영성은 이들을 서로 조화롭게 연대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더욱 조화로운 풍경만들기는 이곳에서 새로이 임무가 주어진 나에게 그 책임이 넘어 온 듯 하였다. 소명이었다.

그러했다. 이곳의 피정센터 설계를 요청받았을 때, 이 일을 그야말로 나의 운명적 과업으로 받았다. 수도원을 순례하고 쓴 『묵상』이 출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이며, 수도사의 절박한 삶이 어쩌면 내 전생 아니면 후생의 모습 아닐까 짐작하던 때였다. 그래서 이 건축은 내 건축의 오랜 여정에 중요한 휴지부일 것으로 짐작했다. 모른다. 종지부일지도….

이미 피정센터가 있었다. 검소하지만 단단한 모습의 기존 시설은 1964년에 한국땅에 지어진 최초의 피정센터로 이 건축은 한국의 교계에 많은 자극과 영감을 던져준 바 있다.. 그런데 새로운 도시 계획으로 생긴 큰 도로가 그곳을 관외로 벗어나게 한 바람에 출입이 안전하지 못하여 새로운 건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또한 오래되어 새롭고 현대적 시설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주어진 장소는 왜관역과 마주하는 수도원 경계에 면한 기다란 땅이다. 이 땅 옆 구성당 뒤에는 마오로관이라는 단정한 건물이 있다. 1957년에 지어 기숙사나 외부인을 위한 숙소로 쓰이면서 적지 않은 세월을 간직한 이 건축을 연결하여 피정센터의 시설로 편입하는 것도 주어진 과제였다. 무려 75년이 넘은 건축과 결합되는 집, 그것으로 새 건축은 그 오랜 역사와 같이 시작하는 것일게다.

 

避靜은 일반인이 일상에서 물러나 한적한 곳에 단기간 머물며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다. 내가 쓰는 말로 바꾸면, 스스로를 경계 밖으로 추방하는 일. 한자의 어원을 따지면 이 글자의 뜻은 더욱 분명해진다. 경계 벽의 바깥에 서성이는 형태의 한자인 ‘避’와 싸움 끝에 오는 맑음이라는 뜻의 ‘靜’을 합쳐 피정이라 했다. 이러한 ‘피정’을 성자 알폰소 리구오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intrate toti, manete soli, exite alii 온전히 들어와, 홀로 머물고, 다른 이 되어 나아가라”

그러니 이 시설은 세상의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이 경계 밖의 삶을 동경하여 찾는 수도원이며, 다시 세상 안으로 복귀할 힘을 얻게 하는 성소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오로지 철저한 고독과 깊은 묵상의 삶을 제공하는 게 이 건축의 목적이어야 했다. 그래서 이 건축을 ‘경계 위의 집’이라 불렀다. 위치마저 수도원과 바깥 세상의 경계면이어서 이 이름은 더욱 적확했다.

100미터 길이의 콘크리트 벽을 서측 경계면에 우선 세웠다. 이는 서쪽 햇볕을 피하기 위함도 있지만, 세상과 분명하게 경계 짓기 위함이다. 이 긴 벽에는 무수한 표정과 장치와 행위가 새겨져 있다. 서로 다른 크기의 좁고 길다란 틈이 부호처럼 있고 벽 밖으로 튀어 나온 세 개의 사각통, 몇 개의 숙소 발코니, 그리고 왼쪽 끝에 첨탑을 가진 별동의 사각매쓰가 긴벽의 연장선 위에 있다. 서향의 빛은 강렬하여 이 모든 표정들을 그 존재대로 밝힌다. 그리고 해가 질 때 붉게 물드는 이 벽, 어쩌면 세상 안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과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수도원 내부에서 구성당 뒤편으로 오르면, 콘크리트 프레임으로 형성된 벽체가 구성당과 기존 마오로관 사이 비어져 있던 공간을 채우며 나타나고 그 벽체 속을 2.4미터 폭 독방의 셀(Cell)들이 반복되며 파고 들어서 있다. 모두가 다른 사연으로 여기에 머물며 만드는 개별의 독방 풍경은 모두가 다를 것이지만 정제된 프레임으로 엮여 전체는 하나의 소망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평화할게다.

입구에 독립한 콘크리트 프레임의 문. 다른 삶의 시작점이다. 이곳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로비에 면하여 남쪽으로 깊은 정원이 나타나며, 팥배나무 가득한 그곳이 서측 벽의 내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로도 뚫린 이 정원을 찾아 비추는 햇살을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에게 약속이며 은총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그렸다. 정원안으로 발을 디뎌 야곱의 사다리를 떠올릴 지도 모를 계단을 오르면, 이어지는 통로가 정원을 가로지르며 서측 벽을 파고든 작은 방으로 안내한다. 기도와 찬송을 위한 오라토리움이다. 때때로 홀로 앉아 묵상하는 공간. 저 높은 천장을 비집고 내미는 가느다란 빛기둥이, 여기를 찾은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다.

세 개 층에 나란히 배열된 방은 모두 독방이며(어린이와 같이 오는 이들을 위해 2인실이 필요하다는 요청을 받아 4층은 독방 둘을 합쳐 큰 방으로 만들었지만 이마저 독방으로 쉽게 변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가장 간단한 마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발코니가 있어 외부 공간을 연결하지만 철저히 홀로 되어 침묵으로 둘러싸인 방. 침묵 속에서만 들을 수 있고, 언어가 사라질 때만 볼 수 있다는 언어를 기억했다.

이곳을 나와 건너편 마오로관을 사이에 두고 떨어진 경당으로 간다. 입구 리셉션 데스크를 지나 완만한 경사로를 타고 내려가는동안 오른편에 펼쳐지는 마당은 이곳 수도원에서 삶을 마친 수도사들을 기념하는 곳, 기념묘역이다. 삶의 마지막까지 세상 경계 밖으로 자신을 내몬 그들 때문에 경계 속 우리가 지속되는 것일 게다.

세상의 지면인 그 마당의 아래로 내려가게 한 경사로의 끝에는 검은 색의 문이 있다. 내가 죽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이다. 육중한 무게의 문을 열면 갑자기 마주하는 12미터 높이의 공간, (폭 9미터, 길이 18미터의 이 공간은 다윗이 설계하고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의 성소 크기와 우연히도 거의 같다) 사뭇 다른 그 크기가 여기는 다른 세계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흰색 벽면에 내려 비치는 빛 다발이 우리를 깊숙하게 반길 게다. 열두개의 작은 빛이 뚫고 들어 오는 제단 벽 오른쪽 아래, 빛이 씻어 내리는 붉은 색 작은 공간 위에 최종태 선생께 제작을 부탁하여 십자가 고상을 달았다. 늦은 오후라면 회중석 뒷벽 위 높게 누운 창으로 낙동강을 비춘 석양이 밀려 들어올 게다. 그러면 모든 벽은 햇살과 달빛과 별빛을 각각 자기 방식대로 받으며 이 성소를 밝힌다. 빛과 어둠이 시시각각 변주되며, 채우고 비우며 새기는 여기. 우리를 드리오니, 그대로 받으소서.

 

이곳에서는 독방이나 성당 혹은 기도소 등에 홀로 있어도 좋겠지만 건물 속을 회유하며 건축공간이 가지는 서사를 읽으실 것을 권한다. 중정의 계단을 오르면 서측벽의 틈새로 스미는 빛들이 팥배나무 속을 뚫고 지나며 밝히는 색이 특별한 경험을 줄 것이다. 중정을 가로 지르는 연결통로, 내부의 긴 복도는 아득하다. 특히 4층 복도의 북쪽 끝부분 수평의 긴 창을 통해 수도원의 지붕들과 그 너머 멀리 전개되는 산들의 중첩된 실루엣을 보다가 통로 끝의 문을 열면 하늘길이 이어지고 어느새 또 다른 특별한 장소에 들어서게 한다. 갑자기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하늘 성당이다. 미사가 열릴 수도 혹은 성가가 가득 채울 이 공간에 앉으면, 당신은 이제 하늘과 마주하는 절명의 순간일 게다. 만약 그때가 일몰의 시간이라면 서쪽의 프레임으로 들어오는 낙동강의 석양빛이 놀라운 은혜의 표적으로 받아 들여질 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붕 속 작은 창들을 통해 내리는 빛의 신비가 가득한 첨탑 속에 들어가 스스로를 위해 기도하시라. 평화가 가득할 수 있을게니….

 

마오로관은 피정센터의 부속시설로서 혹은 독립된 용도로도 쓰이는 집회시설의 공간으로 개수하였다. 수도원의 정문으로 들어와 구성당을 오른 편으로 돌아 올라오면 피정센터의 정면을 마주하게 되고 그 진입로에서 갈라져 이 마오로관에 들어갈 수도 있지만, 피정센터의 실내에서는 2층에서 연결된 브릿지를 통해 연결한다. 크고 작은 집회공간이 새롭게 구획되고 조직되어 있는데 새롭게 나타난 이 건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간 세월의 흔적을 현재에 드러내는 일이었다. 되도록이면 원형대로 복원한다. 그러나 그 사이의 시간의 때를 굳이 감추지 않았다. 그래서 옛 부재들, 문짝이나 바닥들은 지난 시간 이러저리 덧댄 칠들을 벗겨내고 꼭꼭 감춰진 원래의 모습을 보이게 한 것이다.. 심지어 붉은 벽돌을 덮었던 시멘트 모르타르도 벗겨내어 그 속을 알게 하였다.  2층에 새롭게 구성된 대강당과 소강당의 규모에 맞는 공간감을 확보하도록 쓸모없게 된 다락의 바닥을 들어내어 지붕의 목구조를 그대로 노출한 것은 놀라운 풍경을 만들어 내었다. 지나간 역사가 현현한 듯 하였으니 모두를 귀한 존재로 여기게 한 것이다.

“역사적 기억이 없으면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다.” 아도르노가 문화적 풍경에 대해 남긴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Order of St. Benedict Waegwan Abbey

Peace be with you.

 

The Cathedral of Chartres, built in the early 13th century, is a representative Gothic architectural structure famous for housing the robe that the Virgin Mary wore while giving birth to Jesus. Inside the main entrance of the cathedral, a labyrinth with a 13-meter diameter is etched into the floor. Nowadays, most visitors proceed toward the altar without even being aware of the labyrinth’s presence. However, in the past, those entering the cathedral would kneel and crawl through the labyrinth’s twelve concentric circles, only rising after reaching the center and offering prayers before continuing onward. Traversing the narrow labyrinth path, over 260 meters long, would inevitably leave their knees bloodied, but this ritual was considered a necessary procedure.

In 2016, Chinese director Zhang Yang created the film “Paths of the Soul,” which depicts a pilgrimage taken by eleven people from three families living in a small Tibetan village. This road movie with a documentary style is profoundly moving. Among the group are a pregnant woman, a young girl, an elderly man nearing death, and a butcher seeking to atone for the sin of taking lives. They each hold different hopes as they embark on a year-long, 2,500-kilometer pilgrimage to the holy city of Lhasa and Mount Kailash, prostrating their entire bodies to the ground every three steps. The journey involves the entire body: full prostrations. Along the way, the woman gives birth, and the elderly man faces death, making the pilgrimage itself a process of life. They recite prayers, encouraging and comforting each other, but the pilgrimage route is extremely rugged. The path, alternating between steep inclines and descents, is sometimes unpaved or submerged in water, yet they remain optimistic. When their tractor breaks down in a traffic accident, rendering it immobile, they continue to pull their cart by hand, breathlessly but without ceasing their three-step prostrations. Believing that “a pilgrimage is a path of prayers for others, first wishing for the well-being and happiness of all and then for one’s own desires,” they clear the rough path with their entire bodies. 修道. Indeed, asceticism is about enduring physical pain to pave the way. It is not about sitting quietly to achieve enlightenment but about enduring hardship and urgency by breaking the body. Then, what is it that they seek to achieve at the end of this long and painful pilgrimage?

Peace. It must be peace. The ‘P’ adorned on crosses frequently used in the Catholic Church represents peace. After Jesus’ resurrection, the first words he spoke to his disciples were, “Peace be with you…”.

However, the meaning of the Chinese characters ‘平和’ (peace) and the English word ‘peace’ differ somewhat. The character ‘平’ in ‘平和’ depicts the image of similarly sized floating plants on the water’s surface, symbolizing a state of balance, even if there are slight size differences. If any plant grows larger, this balance is inevitably disrupted, meaning such peace is always imperfect. On the other hand, tracing the etymology of the English word ‘peace’, its verb form ‘pacify’ means to subdue or conquer, so ‘peace’ in this context refers to peace obtained through subjugation or suppression. ‘Pax Romana’ or ‘Pax Americana’ are examples of peace enforced by power, but Pax Romana disappeared with the fall of Rome.

If this power were eternal and immutable, there would be eternal peace. This can only be achieved through the authority of an absolute and omnipotent God. That is the realm of religion, and if we wish to receive its grace, we must become believers and live by God’s commandments. However, we, the secular ones, are easily swayed by the sweet whispers of the devil and often forget this truth, thus failing to achieve peace. Therefore, those who resolutely leave the secular world to attain this peace and completely surrender to the Absolute are the monks. Desperate, they wish to be free from the temptations of the flesh, material things, and the mind. To this end, they live lives of chastity, poverty, and obedience. Desperation. I, still unable to break free from the habit of listening to the temptations of the world, can only revere their lives.

 

St. Benedict Waegwan Abbey was established in 1952. However, its foundation is based on a history of martyrdom and devotion. The St. Ottilien Benedictine Congregation in Germany, one of the 21 congregations that organize the Benedictine Order worldwide, was founded in 1884. In 1909, 25 years after its establishment, missionaries were dispatched to the land of the then-doomed Korean Empire, and the Baekdong Monastery was established in Hyehwa-dong, Seoul.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y moved to Wonsan and founded the Deokwon Monastery. They also expanded to Yanji in Manchuria, establishing the Holy Cross Monastery and spreading the Gospel on the Korean Peninsula. However, after liberation, with the rise of the communist regime, they faced persecution, resulting in martyrdom or expulsion. The monks who fled to South Korea sought a landscape similar to Deokwon and re-established the monastic community in Waegwan in 1952.

The current Waegwan Abbey not only includes the main abbey in Waegwan but also has branch monasteries in Seoul, Busan, Gwangju, and even the Newton Abbey in New Jersey, USA, making it a large abbey with an abbot. An abbot is the head of a large, self-sufficient monastery that follows the Rule of St. Benedict. Located near Waegwan Station, this monastery has lost much of its land due to various urban planning projects but still sits on over 20,000 pyeong (approximately 66,000 square meters) and is fully equipped with all the facilities required by a traditional monastery. It is a village for those who have exiled themselves and a place full of peace. When I was first commissioned to design the retreat center and visited for the first time, I was deeply moved. It was like seeing the Cluny Abbey in France, which boasted the greatest influence in medieval Europe, or the reality of the monastery plans found in the library of the Abbey of St. Gall. I was thankful to see nearly a hundred monks living a life of obedience here, dedicating themselves after receiving their calling. It made me feel that there is still hope in this world.

 

The Retreat Center

House on the Border

 

The oldest building at Waegwan Abbey is the former church building, constructed in 1928 by French missionaries. This building served as the foundation for the Waegwan Abbey, where monks who had fled to South Korea gathered to resume monastic life. Although it is a reconstruction of fragments of Western historical architecture and cannot be highly praised for its architectural achievements, the traces of nearly a century of time preserved within this building make it shine brilliantly. The architecture was refined, and its dignity was imposing. In front and to the left is the ‘House of Souvenirs,’ where products and sacred items produced by the monastery are sold. Built in 1935 as an office, it also served as Waegwan’s first kindergarten. Additionally, the building to the right, constructed in 1952 alongside the inception of Waegwan Abbey, initially served as a temporary monastery before being used as a clergy house. These cherished and beautiful heritage structures represent a precious legacy of memories, embodying an ancient future that sustains our existence.

Of course, these buildings represent only a small part of the entire current facilities of the monastery. The main building, which houses the main church, various offices, and the monks’ quarters, suffered partial damage due to a fire in 2007. It was rebuilt in 2009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Ottilien Monastery missionaries’ arrival in Korea, making it the largest structure in the area. Surrounding it are various workshops, almost resembling an industrial complex in their considerable scale. There is the famous St. Benedict Press printing factory, a woodworking shop producing furniture supplied elsewhere, a stained glass workshop, a metal craft factory, a sausage processing factory under the brand name “Bundo Foods,” and even a winery. Additionally, there is a cemetery for the monks, making it a small but complete city. However, the architecture here was not constructed based on a consistent concept and principles, causing some discord among the buildings. Nonetheless, the beautiful spirituality of this place manages to harmoniously unite them. It seems that the task of creating an even more harmonious landscape has now been entrusted to me, as if it were my calling.

Indeed, when I was asked to design the retreat center here, I received this task as my destined mission. It was shortly after the publication of “Meditations,” written during my pilgrimage to the monastery. At that time, I wondered if the desperate life of a monk might reflect my past or future existence. Hence, I anticipated that this architecture would serve as an important pause in my long architectural journey. Who knows? It might even be the final chapter.

There was already a retreat center. Built in 1964, the existing facility, modest yet sturdy, was the first retreat center constructed on Korean soil, providing significant inspiration and stimulus to the Korean Catholic community. However, a major road created by a new urban plan caused it to fall outside the safety perimeter, making a new construction inevitable. Additionally, the old facility required modern and updated amenities. The assigned location for this new construction was a long strip of land bordering the monastery and facing Waegwan Station. Adjacent to this land, behind the former church building, stood the neat Mauro Hall, constructed in 1957 and serving as a dormitory and accommodation for external guests over the years. Integrating this venerable building into the retreat center’s facilities was also part of the task. A new building to be combined with a structure over 75 years old, starting its history alongside such a long legacy.

The term “retreat 避靜” refers to the act of an individual stepping back from their daily life to stay in a secluded place for a short period, reflecting on themselves. To rephrase it in my own words, it is the act of self-exile beyond one’s usual boundaries. The origin of the Chinese characters provides a clearer meaning: ‘避’ (bi) depicts standing outside the boundary wall, while ‘靜’ (jing) means tranquillity that follows a struggle, combining to form the term ‘retreat’ (避靜). Saint Alphonsus Liguori explains this concept as follows:

“Intrate toti, manete soli, exite alii” – “Enter entirely, remain alone, and go forth as a new person.”

Therefore, this facility should be a monastery where those within the boundaries of the world come to experience life beyond those boundaries, gaining the strength to return to the world. It must serve as a sanctuary dedicated to providing a life of profound solitude and deep contemplation. Hence, this building was called “The House on the Border.” Its location, right on the border between the monastery and the outside world, made this name even more fitting.

A 100-meter-long concrete wall was first erected along the western boundary. While it serves to block the western sunlight, it also clearly delineates the boundary from the world. This long wall features numerous expressions, installations, and actions etched into it. There are narrow, elongated slits of varying sizes like codes, three rectangular protrusions, several balconies, and a rectangular mass with a spire on the left end, all aligned with the wall’s extension. The intense western light illuminates all these expressions as they are, and as the sun sets, this wall turns red. Perhaps, for those inside the world, this might become a source of longing and comfort for a new life.

Within the monastery, as you ascend behind the former church building, a concrete frame wall emerges, filling the previously empty space between the former church building and the existing Mauro Hall. Within this wall, 2.4-meter-wide solitary cells (Cells) are repeated and embedded. Each cell, inhabited by individuals with different stories, creates unique personal landscapes, yet all are interconnected by the refined frame. I believed that these individual landscapes, united within this frame, would collectively embody a single hope. Thus, peace would prevail.

At the entrance, a standalone concrete frame door marks the beginning of a different life. Passing through this entry, you enter a lobby that opens southward to a deep garden filled with hawthorn trees, revealing itself as the interior of the western wall. This garden, also open to the sky, is designed to let the sunlight shine upon it, serving as a promise and blessing to its residents. As you step into the garden and ascend a staircase reminiscent of Jacob’s Ladder, a pathway continues across the garden, leading to small rooms embedded in the western wall. These rooms are oratories, dedicated spaces for prayer and hymn. Occasionally, one might sit alone in these spaces for meditation. I hoped that the slender beams of light piercing through the high ceiling would provide great comfort to those who find their way here.

The rooms, arranged in a row across three floors, are all single occupancy (except for the fourth floor, where, upon request to accommodate those coming with children, two single rooms were combined to form a larger room, though it can be reverted back into single rooms). These rooms are finished with the simplest materials. Each room includes a balcony that connects to an external space, yet remains isolated, enveloped in silence. I recalled the idea that only in silence can certain things be heard, and only when language disappears can certain things be seen.

Exiting from here and crossing over to the chapel, separated by the Mauro Hall, you pass the reception desk at the entrance. As you descend a gentle slope, a courtyard unfolds on the right, dedicated to commemorating the monks who ended their lives at this monastery—a memorial cemetery. It is because of those who have cast themselves outside the world’s boundaries until their last breath that we within these boundaries continue to endure.

At the end of the gently sloping path that descends below the ground level of the world, there is a black door. It is the door I must open to die. When you open this heavy door, you are suddenly faced with a 12-meter-high space (coincidentally, the dimensions of this space—9 meters wide and 18 meters long—are almost identical to those of the sanctuary in Solomon’s Temple designed by David in Jerusalem). The distinctly different dimensions make it clear that this is another world. And the beams of light shining down on the white walls will warmly welcome us into the depths. Twelve small beams of light penetrate the right side of the altar wall, illuminating a small red space where a crucifix made by artist Choi Jong-Tae is mounted. In the late afternoon, the sunset over the Nakdong River will flood through a high window on the back wall of the pews. Then, all the walls will be illuminated by sunlight, moonlight, and starlight, each in their unique way, brightening this sanctuary. Here, light and darkness constantly play, filling and emptying, carving their presence. We offer ourselves to you; receive us as we are.

 

In this place, while it is fine to remain alone in a private room, the sanctuary, or a prayer room, I recommend wandering through the building to read the narrative held by its architectural spaces. As you ascend the courtyard stairs, the light filtering through the gaps in the western wall, piercing through the hawthorn trees and illuminating the colors, will offer a unique experience. The connecting passage across the courtyard and the long interior corridor seem endless. Particularly notable is the long horizontal window at the north end of the fourth-floor corridor. From here, you can see the roofs of the monastery and the overlapping silhouettes of distant mountains. When you open the door at the end of the passage, a path to the sky extends, leading you into another special place. Suddenly, you find yourself in a space surrounded by walls on all sides—an open-air sanctuary. Whether a Mass is being held or the space is filled with hymns, sitting here will bring you face-to-face with a transcendent moment. If it happens to be sunset, the Nakdong River’s twilight entering through the western frame might be received as a remarkable sign of grace. Then, within the steeple filled with the mystery of the light descending through small windows in the roof, pray for yourself. Peace will abound.

 

The Mauro Hall has been refurbished to serve as an auxiliary facility for the retreat center or as an independent gathering space. When entering the monastery through the main gate and passing by the former church building on the right, you will face the front of the retreat center. From the entry road, you can branch off to enter the Mauro Hall, or you can cross over from the second floor of the retreat center via a bridge. The building has been restructured to accommodate large and small gathering spaces.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is new construction work was to reveal the traces of time passed. Restoration was carried out as faithfully as possible to the original form, but the marks of time were not concealed. Thus, old elements like doors and floors were stripped of their accumulated layers of paint to reveal their original appearances. Even the cement mortar covering the red bricks was removed to expose what lay beneath. In order to secure a sense of spaciousness appropriate for the new large and small auditoriums on the second floor, the floor of the now-unused attic was removed, fully exposing the timber roof structure. This created a remarkable view, making the building’s history almost tangible and encouraging all who see it to appreciate its val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