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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도장 이로재 20030620

이런 말을 해야 할 지 모르지만, 건축가들 사이에 오래된 농담이 하나 있는데 건축가라는 직업이 매춘부와 비슷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유인 즉, 건축 설계라는 것이 손님을 받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첫째이고, 밤에 일을 주로 한다는 것이 둘째이며 종이를 많이 쓴다는 것이 그 다음이다. 자조적일 수 밖에 없는 농담이지만 이 속에는 겉으로 우아하게 보이는 건축가들의 현실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창작을 직업으로 하는 다른 예술가들과 건축은 작업의 과정이 크게 다르다. 미술가들은 혼자 밀실에서 만들고 그리다가 싫으면 버리고 좋으면 발표하는 일이니 그 과정에 누가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하는 이가 없다. 그러나 건축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제도가 부단히 간섭하기 마련이다.
우선 건축주에게 잘 보여야 일이 받을 수 있으므로 그들이 좋아할 만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야 한다. 고진감래 끝에 일이 생기면 갈고 닦았던 건축 철학은 그 건축주의 간섭으로 상처 받기 시작한다. 그나마 애걸하여 살려 놓은 개념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무지로 훼손 당하고 황당한 건축법규와 관련 공무원으로부터 또 형편없이 난도질 되기 마련이다. 돈 계산에 바쁜 시공자들은 수 많은 밤을 지새워가며 만든 개념마저 변질시키니, 한 건물이 완성될 때 즈음이면 그 건축가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 되는 게 당연하다.
이것 뿐인가. 대학 졸업하고 몇 년을 눈치 보며 실무를 익힌 후 자격시험에 겨우 합격하는 과정이 다른 전문직종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지만 받는 보수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여서 물질에 해탈하지 못하면 이 건축가의 직종은 고통 덩어리이다.
많은 건축가들이 이래서 시니컬 해지고 통음이 습관 되어 있으니 건강이 좋을 리가 없다. 한국의 건축가들이 그래서 요절하여 돌이킬 수 없는 문화 손실을 입게 된다. 김수근 선생이 55세의 나이에 가셨고 장세양 선배가 50을 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느 날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다. 결과표를 보던 의사가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내 뱉었다. ‘이래선 선생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콜레스테롤이며 지방간이며 심장이며 위험 수치를 훨씬 초과해 있었다. 일찍 떠난 이들을 떠 올리게 된 순간,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당시 고등학교 다니던 아들 녀석이 검도를 하고 있었다. 학창시절 잠깐 해 본 검도에 대한 추억이 다시 살아 올라 새벽마다 집 앞의 검도장을 찾기로 했다. 어린 학생들 틈에서 어색하게 느낀 것도 잠시였다.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머무르는 한 순간에 집중하게 하는 검도의 매력이 나를 사로잡은 것이다. 일 년이 지난 다음 다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이미 나의 각종 건강 수치는 위험선 아래로 내려 갔음은 물론이었다.

얼마 전 조그만 사무실을 하나 지어 이사하게 되면서 아예 사무실 지하실을 검도 도장으로 만들 생각을 하였다. 나와 같이 일하는 젊은 직원 모두를 업무 시작 전 검도 수련을 하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건축에 대한 열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열정을 오랫동안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내 사무소의 이름은 이슬을 밟는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로재(履露齋)이다. 검도관 ‘이로재’도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