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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우리의 교회건축 20030404

'베니스 국제 건축 비엔날레’ 라고 불리는 건축전시회가 있습니다. 2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이 전시회는 세계에서 가장 앞 선 건축가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작품을 통해 당대의 건축사조와 미래의 건축환경에 대한 방향을 짐작하는 행사입니다. 주최측에서는 매 전시회마다 주제를 내어 거는데 지난 2000년 새로운 세기를 맞아 설정된 주제는 놀랍게도, ‘ 덜 미학적인, 그래서 더 윤리적인 (less aesthetics, more ethics)’ 이라는 문구였습니다. 검박한 건축이 더욱 윤리적인 건축이라는 뜻입니다. 서양건축과 윤리라는 단어는 그다지 함께 자주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저는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들 서양사람들이 만들어온 최근의 건축사조를 생각할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불과 20년 전만 하드라도 포스트 모더니즘을 새시대를 구원하는 정신인 양 모든 사상적 역량을 집중시켜 건축을 희화화 시켰댔습니다. 대중과 친화한다는 명분으로 로마시대 건축을 흉내 내고 그리스 시대의 장식을 다시 등장시켜 불그락 푸르락하는 색으로 건축을 몽환적으로 만들면서 본질적 문제를 간과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말엽에 세계 철학계에 풍미한 해체주의라는 사조에 영향 받은 건축계는 이 사상이 갖는 중심성에 대한 의심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건축의 모양을 일그러뜨리는 일이 목적이 된 듯 기괴한 모양을 생산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서양인들이 이제 건축의 윤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건축이 존재하는 이유는 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들의 삶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지속되기를 원하는 한 반드시 건축은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고행을 할 수는 있어도 그런 삶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이데커의 말을 잠시 빌리면, 인간은 거주함으로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인간은 건축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삶을 떠난 건축은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건축이 우리의 삶을 위해 봉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인격이나 습관이 자라면서 변해가는 것이라면, 건축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데 직접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건축에서 좋은 삶이 만들어지고 나쁜 건축에서 나쁜 삶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건축은 몹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건축이란 무엇일까요.
높은 담으로 둘러 싸여 으리으리한 규모에 화려한 색채와 문양으로 장식된 건축이 좋은 건축이 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만만한 크기에 검박한 재료와 담백한 색채로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는 집은 삶의 모습이 도드라져 보입니다. 건축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들 삶이 목적이고 건축은 그 배경으로만 있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이런 건축이 자연의 오묘한 소리와 움직임을 섬세히 담을 수 있을 때 그리고 빛과 그림자의 변화를 감동적으로 우리들에게 전달하게 될 때, 이 건축은 그야말로 우리의 선한 본성을 두드려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를 선하게 하고 진실되게 하며 아름답게 만드는 건축, 이런 건축이 좋은 건축입니다. 그리고 건축의 윤리는 여기서 출발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시와 건축은 열악하기 짝이 없지요. 옆 집보다 더 크게 보이고자 하는 욕심으로 하늘은 점점 가려지고 남보다 더 눈에 띄기를 원하여 집 모양을 기괴하게 만들어 시뻘겋고 시퍼런 색으로 칠해 있습니다. 아귀다툼하듯 붙은 간판은 우리 시대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소란스러운가를 눈으로 체험하게 하고 있으며 도로는 이미 우리 사람들의 공간이 아닙니다. 옆집과의 통로는 닫힌 지 오래고 한 뼘의 땅이라도 내 것이라는 것을 더욱 확인시키려 하고 일과 후에는 그 이익을 지키려 굳게 셔터를 내려 도시와 건축은 단절되어 버립니다. 이런 도시 속에 공동체 정신이 건강히 자랄 리 만무합니다. 건축으로만 말한다면 우리는 철저히 비윤리적 사회에 살고 있는 셈 입니다.

문제는 이런 도시 속에 있는 교회들의 건축 모습입니다. 서울의 밤 풍경을 내려다 보면 붉은 네온의 십자가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가로등 불빛이 밝지 않은 변두리에는 거의 십자가의 붉은 불빛들만 보입니다. 이 모든 십자가들의 풍경이 다른 네온 사인과 다르게 서울의 시민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을까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네온의 십자가들은 대부분 뾰족탑 위에 서 있습니다. 어느덧 교회는 뾰족탑을 세워야 교회다워 보인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소위 교회건축의 형식이 된 셈입니다. 심지어는 상가 건물을 임대하여 쓰면서도 뾰족탑 만 덩그라니 올리고 교회라고 강변하는 곳도 허다 합니다. 마치 뾰족탑에 신성이 있는 것처럼 그러합니다. 그러면서 그 건축 자체는 지극히 세속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건축은 뾰족탑에 네온의 십자가에 붉은 벽돌이면 더 좋고 굳은 철문과 높은 담장으로 이웃에 닫혀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건축이 교회일 지는 몰라도 ‘교회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건축’을 ‘교회적 건축’과 착각하고 있는 것 입니다.

본래 교회의 건축은 세계 건축사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이 가진 최고의 지성과 고도의 기술이 융합하여 그 시대 최고의 문화적 결정체를 만드는 일이 교회 건축이었으며 그런 교회건축은 한 시대의 예술혼을 이끄는 좌표였습니다. 모든 건축사의 양식이 그러했지만 특히 고딕 양식은 인간의 실험적 정신이 만든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프라잉 가더라고 불리는 부축벽을 고안하여 하중의 문제를 해결한 고딕은 이제 하늘 높이 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벽체를 가볍게 할 수 있었으므로 현란한 빛을 교회 내부로 끌어드려 오묘하고 신비로운 공간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신성의 강조가 중요시 여겨지는 시대에 고딕시대의 사람들은 신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다시 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열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건축이 시대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확대하면 건축은 그 시대의 미학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 됩니다. 교회건축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원적 민주주의의 시대에 산다면 당연히 교회도 이 사상적 토태 위에서 건축되어여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고딕의 껍데기인 뾰족탑을 고집하거나 고딕의 양식을 답습하는 교회는 시대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유의 주재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께서 교회에만 계실 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은 곳에 계시다거나 성소라는 곳에 머무신다거나 제단 위에 계신다거나 하는 추측은 교회건축을 원시적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면 교회건축은 근본적으로 신을 감동시키는 건축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감동시키는 건축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를 선하게 하고 우리들을 연대하게 하고 이웃에 열려 있는 건축을 뜻합니다. 그것은 윤리적 건축입니다. 검박하고 겸손하게 서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건축을 의미합니다. 그런 교회가 위엄이 있는 교회입니다. 뾰족탑의 허위의 위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 위엄입니다.